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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일기

천황과 총통(2)작위로써의 왕, 지위로써의 왕

 개인적으로 내 의견을 먼저 밝히고 넘어가면, 나는 천황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걸 친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일왕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반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천황, 혹은 일왕 표기와 관련한 논점은 '천황'을 고유명사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일반명사로 이해할 것이냐, 그리고 '일왕'(일본 국왕')의 '왕'을 작위로써의 왕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지위로써의 왕으로 이해하느냐의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천황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천황과 일왕을 각각 '고유명사'와 '작위로써의 왕'으로 해석하고, 일왕 표기를 주장하는 이들은 천황과 일왕을 각각 '일반명사'와 '지위로써의 왕'으로 해석하는 데에서 이견이 발생하게 된다. 장님이 자기가 만진 코끼리 부분만을 들면서 코끼리가 이렇게 생겼다, 아니다 저렇게 생겼다 하고 싸우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고 라는 식으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생각은 없다. 천황이라는 표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천황에 담긴 일반명사로써의 속성을 눈여겨보지 않고, 일왕이라는 표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왕에 담긴 작위로써의 왕의 속성보다는 지위로써의 왕이라는 속성을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 천황을 고유명사로 이해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겠지만 어쨌든 영문으로 'Japanese Emperor' 또는 'Emperor of Japan'으로 '일본의 황제'로 번역되는 자리를 마냥 고유명사로만 받아 들이기는 어렵고, 외교나 학술에서 요구되는 신뢰도와 정밀함에 대해 관련 전문가와 일반 대중의 인식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하고 싶지도 않다. 요컨대, 제발 '낄끼빠빠'를 준수하자는 얘기다. 

 

NHK 대하드라마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왕가'

 

2012년에 일본 NHK에서 방영되었던 대하드라마 '다이라노 기요모리'에서 주인공 기요모리 역을 맡은 마쓰야마 켄이치

 

 내가 "재미있네, 일본 사극은"이라고 생각했던 게 2005년에 일본의 대하드라마 '요시츠네'에서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그 드라마를 보면서 일본의 역사, 특히 헤이안 시대와 '무사'라는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그 전에도 노무라 만사이가 주인공 세이메이로 나온 영화 '음양사'를 보면서 일본의 헤이안 시대라는 시대에 대해 관심을 갖기는 했지만, 한국의 역사물과는 또 다른 보는 재미가 있는 일본의 역사물을 보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도 재미있네, 라고 하면서 일본 사극을 찾아 보게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음양사를 보면서 어렴풋이 흥미를 느꼈던 것이 등장하는 덴노, 그러니까 일본의 천황을 거기서는 '미카도'라고 부르더라는 거다. 보통은 천황 폐하(덴노 헤이카)라고 부르는 게 안 맞나 싶은데, '미카도'는 또 뭐고 싶어서 찾아 보니까 천황을 가리켜서 예스럽게 부르는 말이 '미카도'란다. 한자로는 어문(御門)이라고도 제(帝)라고도 쓰는데, '요시츠네'에서는 '미카도' 말고도 '슈조(主上)'라고도 부르고, '오카미(大君)'라고는 칭호도 나오고, 극중 최강의 '대텐구'라고 할 고시라카와 법황(後白河法皇)도 그냥 '호오 사마(法皇樣)' 즉 '법황님'이라고만 한다. 어쨌든 양위한 상왕이고 일본이 내적으로 황제국 제도를 쓰고 있는 이상 양위한 상황(上皇)도 깍듯이 덴노에게 하듯 '법황 폐하'라고 불러줘야 할 텐데도 그냥 '법황님'이라고만 부르고, 그나마 그 '님(사마)'이라는 말도  법황 말고 그냥 왕자(모치히토 왕)한테도 쓰더라. 이 시대에는 '덴노 헤이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내가 알던 일본이나 덴노를 대하는 것과는 조금 달라서 그 점이 색다르게 다가왔고, 동시에 천황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일본의 사극들을 접하면서 메이지 유신 이전, 막부 말기까지 해당 시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에서 극중 덴노를 부를 때는 거의 대부분이 '미카도'나 아니면 '슈조(주상)', '오카미', '~~테이(帝)'라고 부르지 '덴노 헤이카(천황 폐하)'라고 곧장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도 카츠모토(와타나베 켄 分)가 메이지 천황(나카무라 시치노스케 分)를 향해서 '헤이카(폐하)'라는 칭호만 쓰지 않고 '오카미' 또는 '텐시 사마(天子樣)'로도 부르고 있는데, 일본에서 덴노를  부를 때 '헤이카(폐하)'라고만 부르는 게 아니었던가 하는, 처음 일본 사극을 접하면서 내내 느꼈던 호기심이 지금 이 글을 쓰는 와중에도 반영되어 있다.

 

 2012년에 방영되었던 NHK 대하드라마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그런 점에서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극중에서 천황가를 가리켜 왕가(王家)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보통은 덴노를 '왕'보다 높은 황제와 같은 것으로 여기는 게 통상 일본인의 생각이었을 텐데 칼로 잰 것처럼 '덴노 헤이카'라고만 일관되게 천년 동안 불러온 것도 아니고, 사극에서 미카도니 슈조니 오카미니 테이니 덴시 사마니 하는 다채로운 칭호들이 등장하더니만, 다이라노 기요모리에서는 아예 '천황가'가 아니라 '왕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 나는 당시에는 크게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일본 내부에서는 극중 천황가를 '왕가'라고 부른 이 사극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대해서 말이 좀 나왔던 것 같은데, 우리나라 국정감사 비슷한 일본 참의원 총무위원회에서 NHK에 배정할 예산을 심의할 때 가타야마 사쓰키(片山さつき) 참의원 의원이 당시 참고인으로 출석한 NHK 회장 마쓰모토 마사유키(松本正之)에게 "무슨 생각으로 이 국민적인 프로그램에 대해서 이런 판단을 하셨느냐?"라는 질문을 던질 정도였다니까. 정부 국정감사장에서 언급될 정도면 보통 일은 아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국의 경우로 치면 KBS에서 방영된 사극의 용어를 방통위 국정감사장, 청문회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일이라고나 할까. 

 

https://kokkai.ndl.go.jp/#/detail?minId=118014601X00820120329

 

国会会議録検索システム

 

kokkai.ndl.go.jp

 

 이때 회의록은 일본의 국회회의록 검색 시스템에 그대로 올라와 있다 (138/140, 320 참조). 여기 번역을 싣는다. 

 

가타야마 사쓰키 군(君): (전략) 지금 낮은 시청률에 허덕이고 계신 NHK의 기요모리 말씀입니다만, 황실(皇室)의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죠. 법왕(法王), 상황(上皇), 천황(天皇). 왕가(王家)라는 호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굉장한 비판이 나오고 있습니다만, 이거, 이 호칭을 사용하고 계시는 역사 고증을 하시는 분이 도쿄 대학 사료편찬소(東大史料編纂所)의 준교수(准教授)이신 혼고(本郷) 씨라는 분으로, 그것도 이 분의 학설이겠지만 일반적인 학설은 아닙니다. 이는 문과성(文科省)이나 교과서위원회(教科書委員会) 등에도 들었는데, 그렇지 않답니다. 그걸 마치 정설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어요. 

1972년의 「신 ・ 헤이케 이야기」(新・平家物語) 때에는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원작이라는 것도 있었을까, 황실은 '황실(皇室)' 그대로 쓰셨고, '왕가'라는 우리에게 있어서 별로 들어 본 적도 없는 호칭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만, 어째서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는 것을 NHK에서 결정해 버리신 걸까 하고. 

비판이 있어서 이 프로듀서 이소(磯) 씨라는 분이 확실하게 일반적으로 인정된 표현은 아니라고 하셔서 약간 홈페이지 같은 곳도 고치고 계십니다만, 그런 수정을 하신다면 왜 좀 더 신중하게, 또 궁내청에도 물어보셨냐고, 이것은 황실에 있어서는 조상의 호칭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 '왕가'라는 호칭이 헤이안 시대에 일반적이었다는 역사 교육의 어떤 정도의 합의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그걸 어떻게 생각하셔서 이 국민적인 프로그램에 대해 이런 판단을 하셨는지요? 회장님, 답변해 주시기 바랍니다.

○참고인(마쓰모토 마사유키 군): 대하드라마는 전문가에 의한 시대고증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전문가에 따르면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기에 걸친 중세사 연구의 역사, 학술적 분야에서는 당시 정치의 중심에 있던 법황, 상황을 중심으로 하는 가문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데 '왕가'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대하드라마 '다이라 기요모리'에서도 대응한 것입니다. 

○가타야마 사쓰키 군: 어쨌든 황실을 왕가라고 부른다는 역사적인 일종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정설이 되어 있지 않고 정착해 있지도 않고요, 왜 이렇게 하셨던 걸까요. 그 일로 인해 결과적으로 지금 대하드라마 중에서는 대단한 저시청률이며, 촬영되고 있는 현지 현지사도 '화면이 지저분하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계시고, 헤이케에 있어서도 당시의 황실에 있어서도 미화를 하는 드라마가 아니라는 것인데, 방금 전의 다케우치(武内) 위원의 평가와는 달리 전혀 현지의 관광 진흥에도 기여하고 있는 부분이 적은 것 아닌 듯 싶습니다만, 그런 것도 종합적으로 근거하셔서, 이러한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역사 고증을 취할 때는 그것이 통설인지 이단되는 설인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인지 어떤지 하는 것을 조금 더 생각해서 신중하게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황제 쪽이 상위이고 왕은 하위, 천황은 황제와 동등하기에 왕이라고는 절대로 불릴 수 없다고 합니다. 적어도 메이지(明治) 이후의 우리의 사고방식으로 보면 매우 위화감이 있어서, 그 점을 엄중히 요청드리고, 질의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가타야마 사쓰키와 마쓰모토 마사유키의 질의문답에서 가타야마는 "일반적으로 황제 쪽이 상위고 왕은 하위", "천황은 황제와 동등하기에 왕이라고는 절대로 불릴 수 없다"는 논리로 다이라노 기요모리에서 '왕가'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 공격하고 있고, 마쓰모토 마사유키는 "전문가에 따르면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기에 걸친 중세사 연구의 역사, 학술적 분야에서는 당시 정치의 중심에 있던 법황을 중심으로 하는 '집안'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데 '왕가'라는 말이 사용되었다고 한다"라고 답변하고 있다.

 

혼고 가즈토 도쿄대 사학과 교수.

 

 당시 다카하시 마사아키와 함께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시대 고증을 맡은 혼고 가즈토(本郷和人). 도쿄대 사학과 교수로 전공은 일본 중세사이며, 일본에서는 일본의 총선거를 일본 중세사나 전국시대에 비교하여 분석하는 글을 기고하거나, 역사탐정 같은 역사 다큐멘터리에도 출연해 일본사를 설명하거나 응천의 문, 도망을 잘 치는 도련님 같은 일본사를 소재로 다룬 만화 작품에서 해당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역사에 대한 간단한 설명 및 해설을 써 주거나 하는 등으로 일본사의 대중적 홍보에도 힘쓰고 있다고 한다. 한국에는 그의 저서 <센고쿠 시대 무장의 명암 - 세키가하라 전투의 배신과 음모>가 2022년에 번역되어 나왔고, 일본에서 새로운 연호 레이와(令和)가 선포되었을 때, "令에는 '명령'이라는 뜻이 있는데 꼭 '평화롭게 지내라'라고 권위적으로 명령하는 것 같다."라고 이 레이와 연호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일본에서 국회의원이 세습 비슷하게 대물림되는 현상에 대해서도  "원래 일본인들은 세습을 좋아했다"며 "일본은 역사적으로 과거제 같은 것도 없었고 섬나라 특성상 도망갈 데도 없으니 치열한 경쟁보다는 출생으로 모든 게 납득되는 세습이 받아들여지기 쉬운 환경이었다"고 씁쓸하게 지적한 적도 있다(매일경제 2020년 4월 11일자 '세습 국회의원 한국 5배... 日에는 왜 정치금수저가 많을까). 여담으로 AKB48의 엄청난 팬이시라는데... 개인의 취향이야 존중받아 마땅한 것이다. 

 

 '왕가'라는 용어가 일본에서 그렇게나 센세이셔널한 표현이었는지,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역사고증을 맡은 다카하시 마사아키 그리고 혼고 가즈토, 이소 도모아키 프로그램 수석 프로듀서 모두 극중 왕가라는 표현이 결코 천황가를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었다(週刊ポスト2012年2月3日号)라고 일본 언론에 일일이 해명해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데인 경험인지 2022년 같은 시대를 다룬 가마쿠라도노의 13인에서는 '왕가'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다. 물론 '미카도'니 '슈조'니 하는 용어는 그대로 사용했지만. 이후 혼고 가즈토는 본인의 저서 <수수께끼 다이라노 기요모리(謎とき平清盛)> 62~64쪽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ドラマ・平清盛>では、天皇や上皇の家を「王家」と称します。ですが、今までの大河ドラマでは、天皇家とか皇室とかの語を用い、王家とはいわなかった。どうして今回は新しい呼び方を取り入れるのか。
先ず押さえておかねばならぬのは、当時の言葉の使い方です。
そこで調べてみると、天皇家も皇室も王家も、使われていない、が正解です。当時は天皇や上皇や皇太子や女院などをひとまとめにして「ファミリー」として考える、ということをしなかった。
ある研究者の整理(「<王家>をめぐる学説史」歴史評論2011年8月号)によると、王家という語が用いられるようになったのは、第1章(3)でふれた黒田俊雄氏の権門体制論からのようです。
その後、西洋史の影響を受けて、日本の歴史学でも「王権」の分析が盛んになりました。戦前のように、日本の天皇は他国に例を見ない唯一無二の存在である、というのではなく、天皇を国の頂点に君臨する王と捉える。そうすると自ずと他国との対照・比較の視点が開け、東アジアの中の日本、世界の中の日本を考える際にも有用である。ですので、現在の学界では、王家という呼び方が確実に市民権を得ているのです。そこで時代考証の判断として、学問的な見地から、「王家」の語の採用を提案しました。
<드라마 다이라노 키요모리>에서는 천황이나 상황의 집안을 '왕가'라고 칭합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대하드라마에서는 천황가라든가 황실이라든가 하는 말을 사용했지 왕가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번에는 새로운 호칭을 도입하는가.
먼저 분명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당시의 언어 사용법입니다.
그래서 조사해 보니 '천황가'도 '황실'도 '왕가'도 사용하지 않았다, 가 정답입니다. 당시에는 천황이나 상황이나 황태자나 궁녀 등을 한데 묶어 '패밀리'로 생각한다, 는 게 없었습니다.
한 연구자(<왕가>를 둘러싼 학설사> 역사평론 2011년 8월호)에 따르면 왕가라는 단어가 사용되게 된 것은 제1장(3)에서 언급된 구로다 토시오(黒田俊雄)의 권문체제론(權門體制論)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후 서양사의 영향을 받아 일본 역사학에서도 왕권 분석이 활발해졌습니다. 전쟁 전처럼 일본 천황은 타국에 유례가 없는 유일무이한 존재가 아니라 천황을 국가의 정상에 군림하는 '왕'으로 파악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의 대조·비교의 시점이 열려 동아시아 속의 일본, 세계 속의 일본을 생각할 때에도 유용합니다. 그래서 현재 학계에서는 '왕가'라는 호칭이 확실히 시민권을 얻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대고증의 판단으로 학문적 견지에서 '왕가'라는 단어를 채택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https://hflib.kr/#/search/detail/171309

 

동북아역사자료센터

 

www.hflib.kr

 

덴노는 황제와 동등하기에 '왕'으로 불릴 수 없나

 

 가타야마 사쓰키는 '왕가'라는 다이라노 기요모리 극중에서의 용어를 비판하면서 1972년 사극 <신 헤이케 이야기>에서 '황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을 들었다. 혼고 가즈토가 '당시의 언어 사용법'을 운운하면서 "당시에는 천황이나 상황, 황태자나 궁녀 등을 한데 묶어서 '패밀리'로 생각하는 개념이 없었고, 따라서 '천황가'도 '황실'도 '왕가'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지적한 것은 가타야마 사쓰키가 '왕가'라는 용어를 비판하면서 가져온 "1972년의 <신 헤이케 이야기> 속에서는 '황실'이라고 쓰고 '왕가'라고 안 썼다"라는 발언에 대한 대답이었으리라. 왕가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천황가니 황실이라는 용어도 당시에는 그러한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아서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황실'이라는 말도 역사 용어로써 당시의 사정을 완벽하게 반영하는 용어는 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가타야마 사쓰키는 해당 질의에서 "천황은 황제와 동등하기에 왕이라고는 절대 불릴 수 없다"고 했지만, 일본 역사에서 천황이 '왕'으로 불린 것은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당대의 고문서나 고전문학, 당시 구교나 승려들의 일기에서도 그렇고, 덴노 자신도 스스로를 '왕'이라고 불렀다. 현대 일본 학계에서도 전근대, 메이지 유신 이전에 천황을 가리켜 왕이라고 부른 전례를 이미 당대의 기록들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쓰인 왕은 엄연히 번국, 조공국의 제후왕이라는 '작위'로써의 왕이 아니라 독립국의 군주라는 '지위'로서의 왕이었다. 즉 가타야마 사쓰키는 '작위'로써의 왕만을 운위하며 일본에서 덴노는 황제와 같은 지위였고 왕이라고 불린 적이 없다고 했지만, 실제 일본 역사에서는 '지위'로써의 왕의 개념 역시 존재했고 일본의 덴노 역시도 그런 의미로 '왕'이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던 것이다. 

 

九州之地者, 一人之有也、王命之外、何施私威.
구주(九州) 땅은 한 사람의 것이라. 왕명 이외에 그 누가 사사로이 위엄을 부리겠는가?
- 호겐(保元) 원년(1156년) 윤9월 18일(양력 11월 2일)에 발호된 

이른바 '호겐 신제' 7개조의 제1조 첫머리에서

 

 헤이안 시대 말기에 일본 각지에서는 이른바 '장원'이라는 귀족, 무사들의 사적인 농장들이 남설되어 조정이 세금을 거둘 공령은 줄어들고 있었고, 이는 고려 말기 권문세족들의 토지 겸병과 마찬가지로 국가 재정을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였다. 호겐 신제는 이를 개혁하고자 발표한 것으로 그 주요 골자는 귀족, 무사들의 장원에 대한 규제였다. 그 첫머리에서 "구주 땅은 한 사람의 것"임을 천명하고 있다. 여기서 한 사람, 그리고 '왕명'이 바로 천황을 가리킨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천황을 '구주' 즉 일본 열도의 주인이자 '왕명'의 발호자로 그리고 있는데, '황명'이 아니라 '왕명'이라고 쓰고 있는 것이다. 

 

夫王家之為王家, 在佛法之擁護, 佛法之為佛法, 任王家之歸依. 

又云佛云神, 保護天下, 其誓是同, 譬猶牛二角, 鳥之雙翅而已.
무릇 왕가가 왕가임은 불법(佛法)의 보우하심 때문이요, 불법이 불법임은 왕가가 귀의하고 있기 때문이라. 또한 '부처'니 '신'이니 하지만 천하를 보호하리라 하신 그 맹서는 다 같았으니, 비유하면 소의 두 뿔이요, 새의 두 날개일 따름이다.

- 『헤이안 유문』(平安遺文) 3837호 문서

「지쇼 2년(1178년) 6월 기이 국 대전법원 중도해안」(治承二年六月紀伊国大伝法院衆徒解案)

 

 사실 장원의 남설에 대한 규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장원을 가장 많이 소유한 것이 일본 왕실, 그것도 상황으로써 인세이(院政)라는 이름의 이른바 '상왕정치'를 행하고 있던 '치천의 군' 법황과 그 측근 종친들이었으니까. 각지에서 장원을 개척한 장원영주들은 겐지나 헤이시, 후지와라 씨 등 유력한 무사단, 또는 사찰이나 신사에 자신들의 영지를 기진하고(일종의 위장전입 비슷하게) 그 휘하로 합류했고, 더러는 상황과 그 친족들에게 자신들의 영지를 기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헤이케 역시 그렇게 상황과 그 친족에게 자신들의 영지를 기진하여 그 측근으로 합류해 상황의 무력 기반으로써 일본의 권력을 쥐었던 이들이었다. 

 

その先祖を尋ぬれば桓武天皇第五の皇子、一品式部卿葛原親王九代の後胤、

讃岐守正盛が孫、刑部卿忠盛朝臣の嫡男なり。かの親王の御子、高見王、無官無位にして失せ給ひぬ。

その御子、高望王の時、初めて平の姓を賜はつて、

上総介に成り給ひしより、たちまちに王氏を出でて人臣に列なる、

その子鎮守府将軍良望、後には國香と改む。

國香より正盛に至る六代は、諸国の受領たりしかども、殿上の仙籍をば未だ赦されず
그 선조를 돌아보면 간무 천황(桓武天皇)의 다섯째 황자(皇子),

1품 식부경(一品式部卿) 가즈라와라 친왕(葛原親王)의 9대(代) 후윤(後胤)으로

사누키노카미(讃岐守) 마사모리(正盛)의 손자요 형부경(刑部卿) 다다모리(忠盛) 아손(朝臣)의 적남(嫡男)이라.

저 친왕의 아드님 다카미 왕(高見王)은 무관무위(無官無位)로써 세상을 떠나시었고,

그 아드님 다카모치 왕(高望王)의 때에 처음으로 다이라(平)라는 가바네(姓)를 내리시어,

가즈사노스케(上総介)가 되시고, 곧바로 왕씨(王氏)를 떠나 인신(人臣)에 드옵시니,

그 아들 진수부장군(鎮守府将軍) 요시모치(良望)는 뒤에 구니카(國香)로 고쳤다.

구니카로부터 마사모리에 이르기 6대, 여러 구니(国)의 수령이시긴 하였으되,

전상(殿上)의 선적(仙籍)은 여직 내려받지 못하셨더라.
- 헤이케 이야기 제1장 '기원정사',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선대를 설명하면서

 

 헤이케는 간무 헤이시(桓武平氏), 즉 간무 덴노의 후손이다. 일본의 고전으로 다이라 일문의 흥망성쇠를 그린 《헤이케 이야기》는 그 첫머리에서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가계를 설명하면서 그의 가계를 죽 읊는데, 간무 덴노의 손자 다카모치 왕이 '다이라노 아손(平朝臣)'이라는 가바네를 하사받고 신적강하한 것을 두고 '왕씨를 떠나 인신에 드옵시니(王氏を出でて人臣に列なる)'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왕씨의 '씨'는 문맥상 우리나라나 중국의 특정 성씨인 왕씨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왕의 '씨족' 다시 말해 왕가 나아가 천황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일본어 사전에서는 "천황의 자손으로 성(가바네)를 받지 않은 자. 율령제에서 2세 이하 5세 이상의 황윤을 가리키며 '~~왕'이라고 불린 황족(天皇の子孫で、姓を与えられてないもの。律令制で、2世以下5世以上の皇胤こういん。「…王」とよばれる皇族)"이라는 뜻으로 설명되는데, 천황의 아들들 가운데 친왕 선하를 받았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친왕' 또는 '왕'이라고 불렀으니 '왕씨'라는 말도 천황 자체를 가리킨다고만 보기 보다는 천황의 아들로써 '왕의 씨족'을 가리킨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리 왕씨, 천황의 후손이라고 해도 대수가 내려오면 후지와라 씨 같은 귀족들 앞에서 내가 종친이요 해 봐야 "어쩌라고?"라는 소리밖에 들을 수 없는 신세였고, 헤이안 시대 말기까지 무사라고 하면 귀족들로부터 '집 지키는 개' 취급을 받았다(그런 취급이나 받던 무사로써 태정대신의 자리에까지 오르고 무사가 정권을 장악하는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 바로 다이라노 기요모리이다). 《헤이케 이야기》에서 말하는 '전상의 선적'이란 덴조비토(殿上人)라고 해서 덴노의 거처인 청량전에 오를 자격이 있는 5위 이상의 귀족들을 가리키는(한국으로 치면 당상관 정도려나) 것이었는데, 무사로써 처음으로 그 '전상의 선적'에 오른 것이 다이라노 다다모리, 기요모리의 아버지이다. 

 

다이라노 다다모리.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아버지이지만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기요모리의 친아버지를 시라카와 법황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라카와 법황이 다다모리에게 하사한 궁녀 기온노 뇨고가 마침 시라카와 법황의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그게 기요모리였다는 것이다.

 

 《헤이케 이야기》는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 있어서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 《헤이케 이야기》에는 이 다이라노 다다모리에 관련한 일화가 있다. 5위에 오르게 되었을 때, 무사를 그저 집 지키는 개 취급하던 귀족들로부터 "이세에서 만든 그릇은 전부 헤이시('다이라 씨'를 뜻하는 '헤이시'와 사시를 뜻하는 일본어와 발음이 같다)라네"라며 눈이 사시라는 점을 가지고 비웃음을 샀는데, 한번은 입궐할 때 귀족들이 작당하고 다다모리를 아예 습격하려고까지 했다. 다다모리는 자신이 차고 온 칼을 빼어 자신을 습격한 귀족들을 을러서 쫓아 버렸는데, 이들 귀족들은 다음날 "대궐 안에서 감히 칼을 빼어 휘두른 다다모리를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도바 상황에게 아뢰었지만, 다다모리는 태연하게 "그 칼 어제 궁녀한테 맡기고 퇴궐했었는데 한번 확인해 볼까요?"라고 하고는 그 칼을 가져오게 했고, 가져와서 보니 그 칼은 진검이 아니라 은박을 입힌 목검이어서 '대궐 안에서 칼을 휘둘렀다'는 혐의를 벗은 것은 물론 처신이 현명했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른바 '전상암투'이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이후 호겐의 난과 헤이지의 난을 거치면서 공을 세우고 출세하여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 헤이케 출신의 구교가 배출되었고, 심지어 기요모리 자신의 딸을 다카쿠라 천황의 황후로 들여서 황실과 사돈을 맺고, 그 소생을 덴노로 올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헤이케가 아니면 사람도 아니다'라고까지 일컬을 정도로 급격한 헤이케의 대두와 출세는 기존 귀족과 지샤, 다른 무사 세력들의 불만을 샀고, 헤이케가 이를 무력으로 찍어 누르는 과정에서 각지에서 반발과 충돌이 잇따랐다. 기요모리 사후 2백여 년 쯤 뒤의 사람인 난보쿠초 시대의 구교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자신의 저서 《신황정통기》에서 기요모리 정권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나아가 자신이 살았던 난보쿠초 시대의 동란이 기요모리가 정권을 잡는 계기가 되었던 호겐-헤이지의 난에서 찾고 있다. 이 난을 계기로 천하가 어지러워져서 무용이 중시되고 '왕위'가 경시되었다고 말이다. 

 

 호겐, 헤이지의 난 이래로 천하가 어지러워져서 무용(武用)이 중시되고 왕위(王位)가 경시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태평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은 명분에 걸맞는 올바른 행동이 문란해진 탓이리라.

이지의 난 이후 잠시 정국이 진정되었지만, 천황과 상황의 사이가 나빠졌다.

니조 천황의 외삼촌인 다이나곤 쓰네무네【훗날 유배지에서 소환되어 대신, 대장까지 되었다.】와

천황의 유모의 아들인 벳토 고레카타 등이 고시라카와 상황의 뜻을 거슬렀으므로

상황은 기요모리에게 명하여 이들을 체포하고 유배보내 버렸다.

이후 기요모리는 천하의 권력을 제멋대로 하고 이윽고 다이조다이진이 되었다.

그 자식들도 대신, 대장이 되었으며 게다가 형제까지 나란히 좌우에서 대장에 올랐다.

【니조인 치세에 있었던 사항뿐 아니라 그 전후에 있었던 일들도 여기에 다 같이 기술하였다.】

천하의 구니의 절반 이상이나 헤이케 가령으로 만들고 많은 관위를 일족과 그 가신들이 독점하니,

왕가의 권위는 없는 것과 같은 상태였다.
-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하권, 제78대 니조인(順徳院)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신황정통기》에서 무라카미 덴노 이후에는 ○○덴노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인(院)이라고만 부르는데, 무라카미 덴노 이후에는 그 전까지는 드문드문 붙여지던 일본 천황에 대한 '시호'가 아예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애초에 후대에 이르러 양위한 상왕이 실제 국정을 맡아 행하게 되면서 덴노는 태자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기도 하고. 실제로 인세이 시기에는 태자 책봉도 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덴노가 태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덴노의 권력은 외척인 후지와라 씨, 그리고 직계 존속인 인(상황)에게로 복잡하게 넘어갔고, 덴노 자신은 국정에 있어서 어떤 권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왕위를 떠나 석문(釈門)에 들어간 예는 지금까지도 많이 있다.
-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중권, 제59대/제34세 우다 덴노

 

 상황은 석문 즉 불문에 귀의하여 '법황(法皇)'이라 불리며 세속의 권력자로써뿐 아니라 종교 권력자로써도 활약했다. 승려로 출가한 상태에도 세속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은 채 왕실 안에서 '치천의 군'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후사로 덴노를 갈아치우며 후계 구도를 복잡하게 꼬아 놓았고, 가뜩이나 얼마 없던 덴노의 권위를 더욱 실추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인세이를 지탱한 것이 기요모리와 같은 헤이케, 무사들이었다. 기요모리의 성장 역시 상왕정치를 행하는 '치천의 군'이 무가의 힘을 끌어들여서 기존의 후지와라 셋칸케 같은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는 오히려 무사가 중앙에 진출하며 자신들의 '힘'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후지와라 셋칸케도 인세이를 행하는 치천의 군도 호겐의 난, 헤이지의 난이라는 자신들의 권력 투쟁에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다투어 '집 지키는 개' 취급을 하던 무사들에게 손을 벌렸고, 그 권력 투쟁에 가담하여 세운 공적을 통해 무사들 역시 중앙에 진출하여 인세이를 행하던 치천의 군의 권력을 발판삼아 귀족들과 나란히 서게 되었다. 

 

 잇따른 각지에서의 반헤이케 거병에 역량이 뛰어난 도료(당주)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사망한 뒤에 그를 능가하는 능력을 가진 이가 없었던 헤이케는 차츰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시나노에서 거병한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공격 앞에 헤이케는 결국 교토를 떠나 서쪽으로 낙향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헤이케는 자신들의 피가 섞인 안토쿠 천황과 모리사다 친왕 형제, 그리고 대대로 왕실의 보물이었던 삼종신기까지 모조리 챙겨 교토를 빠져나갔다. 천황의 자리가 공석이 된 것은 물론 새로운 천황의 즉위에 필요한 삼종신기까지 없는 상태에서 '치천의 군'으로 인세이를 행하며 후사를 지명할 권리가 있었던 고시라카와 법황은 다카쿠라 천황의 두 아들 가운데 동생 쪽인 시노미야를 삼종신기도 없이 새로운 천황으로 지명해 즉위하게 했다. 8월 20일의 일이었다. 《헤이케 이야기》는 그러한 상황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https://roudokus.com/Heike/HK116.html

 

平家物語 百十六 名虎(なとら)|原文・現代語訳・解説・朗読

平家物語 百十六 名虎(なとら) 【無料配信中】福沢諭吉の生涯 ■【古典・歴史】YOUTUBEチャンネル 『平家物語』巻第八より「名虎(なとら)」。平家一門なき都では、故高倉院の三宮と四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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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廿日、法皇の宣命にて、四宮、閑院殿にて位につかせ給ふ。

摂政はもとの摂政近衛殿かはらせ給はず。頭や蔵人なしおきて、人々退出せられけり。

三宮の御めのと泣きかなしみ、後悔すれども甲斐ぞなき。

「天に二つの日なし、国に二人の王なし」と申せども、平家の悪行によッてこそ、京田舎に二人の王はましましけれ。
그(8월) 20일, 법황의 선명으로 시노미야(四の宮)가 간인도노(閑院殿)에서 즉위하시게 되었다.

셋쇼(摂政)는 옛 셋쇼인 고노에 님(近衛殿)으로 변함이 없었다.

토(頭)나 구란도를 임명함에 있어 사람들은 퇴출되었다.

산노미야(三の宮)의 유모는 눈물 흘리며 슬퍼하시고 후회하셨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천하에 두 개의 해가 없고, 나라에는 두 명의 왕이 없다」 하였거늘,

헤이케의 악행으로 말미암아 교토와 시골에 두 사람의 왕이 계시게 된 것이다.
- 헤이케 이야기 권8 나토라(名虎)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없고 땅에는 두 명의 왕이 없다'라는 말은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나오는 "하늘에 두 해는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다(天無二日, 土無二王)"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안토쿠 천황과 고토바 천황, 수도와 사이고쿠 두 곳에 존재했던 두 명의 덴노를 헤이케 이야기는 '두 명의 왕'이라고 일컫고 있다. 안토쿠 천황도 고토바 천황도 헤이케 이야기 안에서는 모두 '미카도(帝)'인 동시에 '왕'인 것이다. 

 

 서쪽으로 밀려난 헤이케는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요시츠네 형제와의 대립이라는 겐지의 내분으로 잠시 세력을 회복하는 듯했지만, 요리토모의 천재 군략가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요시나카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눈 깜짝할 사이에 헤이케를 몰아 붙이더니, 이치노타니 전투와 야시마 전투를 거쳐 지금의 시모노세키인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를 완전히 멸망시켰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무단으로 조정의 관직을 받고, 헤이케 타도의 공적을 오로지 자신에게 돌린다'는 참소를 받아 형 요리토모와의 사이도 틀어지고, 예전 오슈 후지와라 씨의 당주로써 헤이케와도 대등한 힘을 지니고 요시츠네 자신을 비호해 주었으며 헤이케가 멸망한 뒤에는 헤이케에 이어 요리토모를 두렵게 했던 오슈 후지와라 씨의 당주 후지와라노 히데히라에게 최후의 기대를 걸고 도망쳐 들어갔던 오슈 후지와라 씨의 도시 히라이즈미에서 히데히라 사후 새로운 당주가 된 후지와라노 야스히라의 습격으로 자결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요시츠네를 체포한다는 명분으로 고시라카와 법황으로부터 일본 각지에 치안 유지를 맡을 '슈고'와 필요한 병량미를 거두는 '지토'를 설치할 것을 요구해 허락을 받아 내고, 요시츠네가 도망쳐 들어간 오슈를 쳐서 히라이즈미를 함락시키고 오슈를 장악했다. 헤이케에 이어 오슈 후지와라 씨마저 멸망시키고 히노모토(日本)의 패자가 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겐큐 3년(1192년) 7월 12일 고시라카와 법황의 조정으로부터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된다. 일본 역사에서는 요리토모의 세이타이이쇼군 임명을 '가마쿠라 막부'의 시작으로 본다.

 

요리토모는 일신의 전력을 기울여 난을 평정하였다.

왕실은 옛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더라도, 수도의 전란은 진정되고 만민의 부담도 가벼워졌다.
-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 하권, 폐제(廃帝)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일본 역사상 최초의 막부를 연 최초의 쇼군이었지만, 그가 고안한 막부라는 시스템이 700여 년에 걸쳐 일본의 정치 제도로 작동하게 된 것과 달리 정작 요리토모 사후 그의 후손이 쇼군으로써 군림한 것은 2대로 끝났다. 요리토모의 처가였던 호조 집안이 쇼군의 보좌역인 싯켄(執權)으로써 막부의 실권을 쥐었고, 쇼군은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조정에서 상황으로써 인세이를 행하고 있던 고토바 상황은 쇼군 사네토모(3대 쇼군이자 요리토모의 차남)의 피살을 계기로 막부 타도의 명령을 각지에 내렸지만, 무사들은 덴노의 선지를 등지고 싯켄 호조 집안을 중심으로 하는 막부로 뭉쳐 조정을 치는 길을 택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에서 덴노의 조정은 힘을 잃고 막부에 의해 '관리'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토바 상황과 그 아들 쓰치미카도, 준토쿠 두 천황은 폐위되어 교토에서 먼 곳으로 유배되었고, 고토바 상황이 치천의 군으로써 지명해 즉위시켰던 어린 덴노도 폐위, 막부가 지명한 왕자가 덴노로 즉위하게 되었다. 덴노와 그 조정이 막부에 모든 실권을 빼앗기고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한 7백 년의 무사정권이 본격적으로 개막한 것이었다. 

 

왕가, '천황'의 지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는 가문

 

 앞에서 혼고 가즈토는 일본에서의 정치인 세습 현상을 두고 "일본인들은 원래 세습을 좋아했다"고 씁쓸하게 말했다. 정치인도 기업 회장도 심지어 동네 횟집도 일본에서는 '가업'이라는 이름으로 대물림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한 집안이 하나의 가업을 다른 집안과 별개로 분담하여 세습하는 경향은 이미 헤이안 시대에 나타났고, 이는 일본에서 덴노의 지위를 결정짓는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국왕은 그에 걸맞는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만,

일본국에서는 국왕의 종성(種姓)을 가지지 못하면 국왕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신대(神代) 이후로 정한 관습이다.
- 승정 지엔(慈圓) 저 《구칸쇼》 제7권

 

 가마쿠라 시대의 승려 지엔 승정은 일본에서 '국왕'의 종성을 가지지 못한 자는 국왕이 될 수 없다는 관습을 자신의 저서 《구칸쇼》에서 언급하고 있다. 가마쿠라 막부가 조정을 상대로 승리하고도 덴노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덴노를 즉위시키고 그 자신이 덴노가 되지는 않았던 것은 어쨌든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하늘이 무너지고 세상이 무너져도 오직 아마테라스의 후손인 덴노의 일족만이 덴노가 될 수 있다는 합의가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며(《구칸쇼》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 아라이 하쿠세키의 《독사여론》과 함께 일본의 3대 사론서로 꼽히는데,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는 지엔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의 합의 같은 것이었다. 지엔보다 3백 년 정도 앞선 일본의 입송(入宋) 유학승 쵸넨(奝然)이 옹희 원년(984년) 송 태종을 알현한 자리에서 일본의 덴노를 두고

 

國王以王為姓,傳襲至今王六十四世,文武僚吏皆世官

국왕은 왕을 성으로 삼아서 64대 왕까지 이어졌습니다. 문무 관료는 모두 세습한 관료입니다.

《송사》 권491 열전권제250 외국7 일본국

 

라고 해서 일본의 국왕인 덴노가 대대로 '천손'이라는 이름의 황손들에 의해서 계승되어 왔다는 인식을 보여 주고 있는데, 이는 당송 변혁을 거친 중국의 천자와의 차이를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천황가의 존속은 일본에서 일어난 사회적 변혁과도 연관이 있다. 쵸넨이 태어났던 10세기 말에는 일본에서 조정의 상급 관직은 귀족층에 의해 독점되고 있었고, 지엔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300년이 지나는 동안 일본에서는 특정 관직을 특정 집안이 분담하고 이를 '가업'으로 계승하는 경향이 굳혀져갔다. 각 가문마다 그 가격(家格)과 가업이 정해져서 사회적 지위와 직무, 토지와 기록 등의 가산도 대대로 세습하여 계승하는 귀족의 가문이 제각기 '이에(家)'라는 이름으로 확립되었고, 덴노의 지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는 '왕가(천황가)'의 존재 역시 그러한 '특정 집안에 의한 사회적 지위와 직무 세습'의 경향화 속에서 확립된 것이었다. 국왕(덴노)의 지위를 세습, 계승하는 왕가(천황가)와 그 왕가를 보좌하는 고위 섭관의 지위를 세습, 계승하는 섭관가(셋케), 그리고 무력으로 이들 왕가와 섭관가를 보좌하는 무가(부케) 하는 식으로 각자의 가격이 매겨지면서 동시에 천황의 지위 세습 역시 그 집안의 '가업'으로써 확립, 계승되게 되었던 것이다. 

 

http://www.maroon.dti.ne.jp/rekikakyo/magazine/contents/kakonomokuji/736.html

 

歴史科学協議会 - 『歴史評論』2011年8月号

 論  説   内親王女院と王家 ―二条院章子内親王からみる一試論― 野口 華世

www.maroon.dti.ne.jp

 

 혼고 가즈토의 책에서도 언급된 구로다 토시오의 '권문체제론'은 이러한 '왕가(천황가)'와 '섭관가(셋케)', '무가' 등으로 분화되어 집안의 가업과 가격이 매겨지게 된 헤이안 시대 말기의 상황을 감안하고 보면 개념 이해가 쉽다. 권문체제론은 한마디로 중세 일본의 국가 구조는 덴노 즉 '왕가'를 국가의 핵심에 두면서도 그 주위로 '섭가'와 '무가' 등 여러 개의 이른바 '권문(權門)'이 서로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상호 보완적으로 존재하며 국가권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국가관이다. 이 '권문'은 한국사의 권문세족이라는 용어에도 나오는 그 권문인데, 구로다 토시오는 이 권문에 '왕가' 즉 천황과 상황의 가문들까지도 포함시킨다. 이는 천황이라는 '군주'가 정점에 군림하면서 '문신 권문'인 공가들이나 '무사 권문'인 무가, 또는 '종교 권문'인 지샤에 명령을 내리거나 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공가나 무가는 무조건적으로 천황에게 복종하면서 상황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천황 역시도 섭가(공가)나 무가와 마찬가지로 '권력'을 가진 한 '축'으로서 기능하면서 서로가 서로와 융합하고 또 서로를 견제하기를 반복하며 일본 역사가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권문체제론은 일본에서 덴노의 조정과 쇼군의 막부를 각각 하나의 '왕권'으로 간주한 고미 후미히코(五味文彦)의 두 개의 왕권론(二つの王権論)과 함께 현대 일본 중세사 연구에 있어서는 거의 정론으로 수용되어 가고 있다. 


 구로다 토시오가 권문체제론을 주장하면서 지적한 것이 '천황가'나 '황실'이라는 용어가 근대 일본 국가권력에 의해서 사용된 용어라는 점이다. 물론 황실이라는 용어 자체는 고대의 사서인 《속일본기》에도 나오는 것이지만, 구로다의 주장은 이전까지는 왕이라고 부르던 것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천황으로 고치고 천황 용어만을 쓰도록 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전까지는 '천황'이라고 부르든 '왕'이라고 부르든 이중 어느 한쪽이 경칭이라거나 격하라거나 하는 인식이 없었던 것을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그 메이지 신정부라는 국가 권력에 의해 '천황'만이 높이는 칭호이고 왕이라는 칭호는 낮추는 칭호라는 인식이 신정부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의도적으로 정립되고 대중에 프로파간다로 퍼뜨려졌다는 것이 골자이다. 근대에 정치적인 이유로 성립, 유포한 용어로 과거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은 자칫 모종의 선입견, 이데올로기 등 사고상의 제약을 줄 수 있다고 보았기에 구로다는 그러한 메이지 신정부에 의해 프로파간다로써 퍼뜨려진 덴노의 기존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중세 일본에서 실제로 자주 사용된 예를 볼 수 있는 '왕가'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천황과 조정을 연구하자는 방법론을 제창한 것이다(구로다 토시오 '중세 천황제의 기본적 성격', 1977).

 

 일본 역사를 공부해 보면 알겠지만 일본 역사는 결코 군주인 천황이 주도해서 뭔가를 운영하거나 결단한 역사가 거의 손에 꼽을 정도로 없다. 말 좀 험하게 보태면 일본이라는 '왕국'의 역사에서 국왕인 덴노의 역사는 조선과 같은 군약신강을 넘어서 그냥 덴노가 셋칸 혹은 쇼군의 권력에 기생충처럼 들러붙어서 숨만 쉬는 구조로 메이지 시대까지 천 년 넘게 이어져 내려왔다. 기존 '천황가'니 '황실'이라는 용어가 엄연히 천황가에 비등하게, 혹은 그 이상으로 중세(어쩌면 그 이후까지) 일본 역사 전개의 중추를 차지했던 섭가나 무가를 단순히 천황가나 황실에 부속된 곁가지이고 독립성이 없었다고 여겨지게 함으로써 일본의 역사를 지나치게 천황 중심으로만 이해해 버리는 착오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 구로다의 지적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미 덴노의 지배 권력을 쇼군의 권력과 마찬가지로 '왕권'으로 표현하며 근현대 이후로 덴노에 대한 학술 연구에 '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경우들이 늘어났는데, '왕권'이나 '왕가', '왕조'라는 용어 역시 일본 학계에서는 타국의 왕정 국가에 대한 서술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사에 있어 덴노의 군주정을 다루면서 진작에 사용한 용어였다.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영상화 작품에 그러한 학계의 견지가 반영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두 개의 왕통과 무가 정권

 

 싯켄 호조 집안은 백여 년에 걸쳐서 일본을 지배했고, 호조 집안을 타도하고 막부를 멸망시켜 국가의 권력을 다시금 덴노가 행사하여야 한다는 인식이 등장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싯켄 호조 집안의 종가인 도쿠소(得宗)의 당주가 된 호조 다카토키의 시대에 가마쿠라 막부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 뒤에 성립된 일본의 군키모노가타리(군담소설) 《태평기》는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을 '암군' 호조 다카토키에게서 찾고 있다. 태평기 안에서 호조 다카토키는 정치에 관심이 없고 덴가쿠(田樂)와 투견으로 나날을 보내는 무능하기 그지없는 싯켄으로 그려진다(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무능하지도 사악하지도 않았지만, 무가 정권의 수장이라고 하기에는 몸이 많이 병약했던 것은 틀림없다). 

 

 《태평기》에는 호조 다카토키에 대한 일화 가운데 하나로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루는 사가미 뉴도, 즉 호조 다카토키가 술에 취해서 자신의 방에서 평소처럼 덴가쿠에 몰두하는데, 어디선가 열 명 정도의 덴가쿠 광대패가 나타나 다카토키와 어울려 함께 덴가쿠를 추기 시작했다. 그때 바깥에 있던 어느 시녀가 다카토키의 방에서 "덴노지에 요령성 보이네(天王寺のや妖霊星を見ばや)"라는 노래가 들려 오는 것을 듣고 호기심에 몰래 다카토키의 방을 엿보았는데, 다카토키 주위를 에워싸고 덴가쿠를 추는 광대들이 하나도 사람의 모습을 한 것이 없고 입이 튀어나오거나 눈이 찢어진 등 야마부시(山伏) 즉 텐구의 모습을 한 요괴들이 수십 마리나 다카토키 주위에 몰려들어 춤을 추고 있었다. 시녀는 급히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렸고, 사람들이 와 보니 다카토키만 혼자 술에 취해 방 안에서 잠들어 있고 다카토키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새의 발자국 같은 것들만 잔뜩 찍혀 있었다. 이를 전해들은 형부소보(刑部少輔) 후지와라노 나카노리(藤原仲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덴가쿠에 빠져 있는 호조 다카토키와 그를 에워싼 덴구들. 메이지 시대에 그려진 삽화이다.

 

天下将乱時、妖霊星と云悪星下て災を成すといへり。

而も天王寺は是仏法最初の霊地にて、聖徳太子自日本一州の未来記を留給へり。

されば彼媚者が天王寺の妖霊星と歌ひけるこそ怪しけれ。

如何様天王寺辺より天下の動乱出来て、国家敗亡しぬと覚ゆ。

哀国主徳を治め、武家仁を施して消妖謀を被致よかし。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때, 요령성(妖霊星)이라 하는 악성이 내려와 재앙을 일으킨다 하였다.

더구나 덴노지(天王寺)는 바로 불법이 처음 일어난 영험한 땅인데,

쇼토쿠 태자께서 몸소 일본 한 주의 미래기(未来記)를 남기셨다.

그렇다 하면 그 미혹하는 자가 '덴노지의 요령성'이라 노래한 것도 괴이한 일이다.

실로 덴노지 주변으로부터 천하의 동란이 일어나 국가가 패망할 것을 깨우치려 함이다.

이제 국주(国主)가 덕으로 다스리고 무가가 인을 베풀어 요사한 모의를 제거하는 일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 《태평기》 권5 '사가미 뉴도가 덴가쿠와 투견에 빠진 일(相摸入道弄田楽並闘犬事)' 중에서

 

 요령성은 일본어로 읽으면 요레보시(ようれぼし)인데 반요 야샤히메에서도 나온 그 요령성이다(거기서는 운석으로 나왔지만).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살별 즉 혜성의 출몰은 동서양 모두 불길한 징조로 여겼다. 그 요령성이 덴노지 즉 쇼토쿠 태자가 지었다는 시텐노지(四天王寺)에 나타났다는 노래에 대해서 후지와라노 나카노리는 덴노지 주변에서 천하의 동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고(《태평기》에 언급된 '미래기'는 쇼토쿠 태자가 장차 일본의 미래를 예언한 글을 남겼고 거기에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과 고다이고 덴노의 왕정복고 또한 기록되어 있었으며, 이 미래기를 토대로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을 정당화하였다고 나온다) '국주가 덕으로 다스리고 무가가 인을 베풀어 요사한 모의를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주'는 이와나미 문고본 《태평기》에서는 국왕(国王)으로 되어 있는데 국주나 국왕이나, 어느 쪽이든 '무가'와 구별하여 덴노를 가리키는 말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고다이고 덴노가 무사들에게 비밀리에 가마쿠라 막부 타도를 명하는 윤지를 내렸고, 이는 누설되었다. 고다이고 덴노는 히에이 산으로 도망쳐 농성했지만 실패, 막부에 체포되어 오키 섬에 유배되는 처지가 되었다. 조큐의 난 때에 고토바 덴노가 유배되었던 곳이 오키 섬이다.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기도 및 실패를 일본 역사에서는 '겐코의 변'이라고 부르는데, 히에이 산으로 도망쳤던 고다이고 덴노가 결국 '머리는 빗질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헝클어지고, 평복에 장막 하나 달랑 뒤집어 쓴 꼴'로 막부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하나조노 천황(제95대)은 치를 떨었다. 그는 덴노가 다시금 막부에 체포되는 신세가 된 것을 왕가의 수치라고 부르고 있다.  

 

王家之恥, 何事如之哉? 天下静謐, 尤雖可悦, 一朝之恥辱, 又不可不歎
왕가의 수치가 어디 이와 같은 것이 있으랴?

천하가 평온해짐이야 매우 기쁜 일이라 하나,

하루 아침의 치욕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하나조노 천황 신기(花園天皇宸記)》 겐코 원년(1331년) 별기 10월 1일조

 

 하나조노 천황의 자필 일기는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그리고 하나조노 천황은 막부 타도에 실패하고 이어 막부에 의해 체포된 고다이고 덴노의 처지를 '왕가의 수치'라고 적고 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신하에게 체포되는 신세가 된 것은 왕으로써는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리고 오키 섬으로 유배된 고다이고 덴노는 다시금 막부 타도를 목표로 움직였고, 오키 섬을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가와치에서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지하야 성에서 막부군을 상대로 버티며 농성하는 와중에 막부의 명령으로 다시금 반막부 봉기 진압을 위해 막부의 대군을 거느리고 교토로 향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그대로 막부에 반기를 들어 교토를 장악하고, 닛타 요시사다가 무사들과 함께 가마쿠라로 진공해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켰다. 

 

우리 나라는 왕종(王種)이 바뀐 적은 없지만 정치가 어지러워지면 치세의 연수가 짧아지고

(황위가) 직계로 전해지지 않는 예를 여러 곳에서 기술하였다.

- 기타바타케 지카후사 저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 중권, 제52대/제29세 사가 덴노

 

 고다이고 덴노가 막부를 타도하고 세운 새로운 친정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현실에 맞지 않는 친정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이 모여들어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추대해 그가 다시금 새로운 막부를 세웠고, 고다이고 덴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에 고다이고 덴노는 겐코의 난이 실패하고 오키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시금 교토를 탈출해 나라의 요시노로 달아나 그곳에서 새로운 조정을 열고, 자신은 양위한 적이 없으며 엄연한 일본의 정통 덴노임을 천명했다. 서기 1336년의 일이다. 북쪽의 교토와 남쪽의 나라(요시노)에 두 개의 조정이 나란히 서서 각자가 서로를 '비정통'이라 욕하며 스스로를 '정통'이라 칭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본 역사에서는 이를 '난보쿠초 시대(南北朝時代)'라고 부른다. 난보쿠초 시대가 무로마치 막부의 북조로 합일되는 것은 1392년의 일이다. 그리고 남북조 합일 이후 무로마치 막부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해, '센고쿠 시대'의 시작이라고 불리는 오닌의 난(1467~1477)을 계기로 무로마치 막부도 덴노의 조정도 지위 외에는 모든 것을 잃고 화석화되고 만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일본의 정치가 어지러워지면서 덴노의 치세 연수가 짧아지고 왕위가 직계로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인세이 이후로 이어져 내려온 일본 왕실의 고질적인 후계 구도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고다이고 덴노가 즉위할 무렵에 일본의 황실 안에는 덴노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두 왕통이 존재하고 있었다. '치천의 군'이었던 고사가 덴노(88대)가 처음에 4남 히사히토 친왕, 고후카쿠사 덴노(89대)에게 양위를 했는데, 원래대로라면 고후카쿠사 덴노의 후손이 별 일 없이 왕위를 그대로 이어나갈 터였음에도 고사가 덴노가 늘그막에 얻은 8남 쓰네히토 친왕을 총애하게 되어 고후카쿠사 덴노에게 고후카쿠사 덴노의 아들이 아닌 동생 쓰네히토에게 양위할 것을 명령했다. 인세이는 상왕의 자리에서 덴노나 다름없는 정치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지만, 그저 상황이라는 이유만으로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인세이를 행할 자격이 있는 '치천의 군'은 단 한 명뿐이었고, '치천의 군'은 현직 덴노의 직계 존속 관계에 있어야 했고(즉 아들에게 인세이를 할 수 있어도 동생에게 인세이를 할 수는 없다) '치천의 군'이 아니면 상황이라도 인세이를 할 수 없고, 자신의 후손에게 왕위를 돌리는 것조차 할 수 없다. 고후카쿠사 덴노에게 아들 말고 동생에게 양위할 것을 명령한 고사가 덴노는 쓰네히토 친왕, 즉 가메야마 덴노(90대)의 아들을 태자로 정해서 가메야마 덴노의 후손에게로 왕위가 이어지도록 할 것처럼 조치를 해 놓고도 끝내 자신의 사후 다음 '치천의 군'이 누가 되어야 하는가를 명시하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치천의 군은 고후카쿠사 상황이냐, 아니면 가메야마 천황이냐를 놓고 벌어졌던 분쟁에 막부가 개입해 중재했는데, 중재안은 어이없게도 고후카쿠사 상황의 후손과 가메야마 천황의 후손이 10년 주기로 돌아가면서 로테이션으로 즉위하라는 것이었다.  막부에 거스를 힘이 없었던 조정은 이 말 같지도 않은 중재안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만세일계' 일본의 왕위 계승은 '일계'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요상하게 꼬여 버렸다. 여기서 고후카쿠사 상황의 후손을 지묘인 왕통, 가메야마 천황의 후손을 다이카쿠지 왕통이라고 한다. 덴노가 되어 봤자 자신의 후손에게 죽 황위를 돌아가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지묘인 왕통이나 다이카쿠지 왕통이나 모두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는 중재안이었고, 덴노는 한 번 즉위했다고 종신 재위하는 것도 아니라 자신의 후손도 아닌 다른 왕통에 넘겨 줘야만 했다. 이러한 왕위 계승에 대한 불만은 고다이고 덴노가 막부 타도를 꾀하는 한 동인이 되었다고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다이카쿠지 왕통인 고다이고 덴노가 막부를 쓰러뜨린 뒤, 그 고다이고 덴노의 신정에 불만을 품은 무사들의 집결로 새로운 쇼군으로 추대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자신의 막부의 존립 정당성을 다이카쿠지 왕통과 대립하던 지묘인 왕통의 고묘 덴노에게서 구했다. 남북조는 지묘인 왕통(북조)과 다이카쿠지 왕통(남조)의 갈등이라는 일본 왕실 내부의 분쟁이 극대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금중병공가제법도와 곤치인 스덴 - 일본의 왕은 조선의 왕과 국서를 교환하지 않는다

 

 메이지 유신 직전의 근세인 에도 막부에서는 이른바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를 제정해 조정과 구게들에 대한 일종의 규제책을 정했다. 원칙적으로는 조정과 막부 사이의 합의였지만, 규제 대상에 '덴노'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은 전대미문이었다. 승정(僧正)의 임명 규정을 정하는 14조에 「국왕」(国王)이라는 문언(文言)이 보이는데,

 

僧正【大、正、權】、門跡院家可守先例。

至平民者、器用卓抜之仁希有雖任之、可爲准僧正也。

但、國王大臣之師範者各別事。
승정(僧正)【대(大)、정(正)、권(權)】과 몬제키(門跡), 인케(院家)는 선례를 지킴이 가하다.

평민에 이르는 자까지 그 재주가 뛰어나고 두드러질 만큼 인하여 찾아 보기 드문 자로 임명하되

승정에 준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다만 국왕 대신의 사범(師範) 되는 자는 별개의 일로 한다.

 

 18세기 후반에 성립된 금중병공가제법도의 주석서 『게이초 공가제법도 주석 전』(慶長公家諸法度註釈全)에는 국왕이란 「천자(天子, 즉 천황) ・ 쇼군」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이 금중병공가제법도 제정에 관여했던 인물로 1617년에 막부의 자문을 맡았던 승려 이신 스덴(以心崇伝)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교토 난젠지(南禅寺)의 곤치인(金地院)에 머물렀다 해서 곤치인 스덴(金地院崇伝)이라고도 한다. 사원제법도(寺院諸法度) ・ 무가제법도 ・ 금중병공가제법도(禁中並公家諸法度)로 대표되는 에도 막부의 법률 입안과 외교, 종교 통제를 일선에서 맡았고(기리시탄 단속을 위한 단가 제도도 이 사람이 고안했다) 명의 영락제의 측근이었던 요광효와 마찬가지로 에도 막부의 흑의재상(黒衣宰相)이라고 불린 인물이다.

 

 곤치인 스덴은 조선에서 보내 온 국서(곤치인 스덴이나 막부 인사들은 조선에서 국서를 먼저 보내 온 줄로 알고 있었고, 조선에서는 일본에서 먼저 사죄의 뜻을 밝혀서 그에 대해 회답하는 뜻에서 글을 보냈다. 그리고 중간에서 조선과 일본 양국이 '먼저' 사과의 뜻을 밝힌 것마냥 국서를 위조한 것이 쓰시마 후추 번이었다)에 도쿠가와 쇼군의 칭호를 「일본국 미나모토 아무개」(日本国源某)로 칭하고 「왕」을 쓰지 않았는데 중화사상(中華思想)의 권역인 조선의 입장에서 보아 일본의 왕은 조선이나 베트남처럼 책봉을 받은 왕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하여 일본의 왕(이 경우는 천황)과 조선의 왕은 국서의 교환을 하지 않는다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도 '작위'로써의 왕(제후왕)이 아니라 '지위'로써의 왕으로 쓰였으며, 일본에서도 천황을 가리켜 왕으로, 즉 '작위'로써의 왕이 아니라 '지위'로써의 왕으로 왕으로 보는 인식과 그렇게 부른 사례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곤치인 스덴은 후술할 아라이 하쿠세키처럼 혐한적인 면도 있어서 쇼군이 조선에 보내는 국서 형식을 그에게 자문했을 때,

 

고려(조선)는 일본보다 낮은 개같은 나라(戌國)라, 일본의 왕이 고려 왕과 동등하게 '왕'을 칭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는 이유로 국서에 '일본 국왕'이라고 써넣는 것을 반대했다고도 한다(요시노 마코토 《동아시아 속의 한일 2천년사》). 쉽게 말해 덴노나 쇼군께서 저 개 같은 조선 것들 왕하고 똑같이 노는 거 아닙니다라는 취지라고나 할까.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1617년 일본에 온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 정사-오윤겸/부사-박재)가 쇼군 히데타다의 답서에 '일본국 미나모토노 히데타다'라고 쓴 것이 대등외교에 맞지 않는다며 '일본국왕'으로 바꿔 써 달라고 요청했을 때 곤치인 스덴은 이렇게 대답했다. 

 

쇼군은 왕이 아닌데 어떻게 '일본국왕'이라고 쓰나?

- 이경직 《부상록》

 

 이것도 가만 생각하면 스덴 역시 "쇼군은 '일본국왕'으로 불릴 수 없다(='일본국왕'은 덴노 뿐이다)"라고 생각했음을 엿볼 수 있다. 스덴이 제정에 관여한 금중병공가제법도에서도 덴노와 쇼군을 '국왕'으로 불렀음을 감안하면 거의 확실하다.

 

 일본에서 덴노를 가리키는 칭호는 '천황'과 '왕'이 모두 혼재되어 쓰였다. 일본 천황의 계보를 설명하는 저술도 남북조 시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처럼 황(皇)자를 써서 제목을 붙인 책도 있는가 하면, 에도 시대의 하야시 가호(林鵞峰)일본왕대일람(日本王代一覧, 1634년)처럼 왕(王)자를 사용한 책도 존재한다. 일본왕대일람은 일본의 천황가를 진무 덴노부터 오기마치 덴노까지 소개한 저술로,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장 아이작 티트싱(Isaac Titsingh)에 의해 데지마를 떠나 유럽에 전해졌고 1834년에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는데, 프랑스어 번역 제목이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즉 '일본의 역대 황제들'이었다. 일본에서는 '왕'이라고 쓴 제목이 프랑스에 전해져서는 '황제'로 번역된 흥미로운 사례다.

 

일본 국왕과 일본국 대군 사이 - '작위'로써의 왕과 '지위'로써의 왕의 충돌

 

 에도 시대 중기에 아라이 하쿠세키와 아메노모리 호슈 사이에 있었던 논쟁은 왕을 '작위'로써 대하는 시각과 '지위'로써 대하는 시각이 충돌한 아주 두드러지는 사건이었다. 대조선 외교에 있어 에도 막부 쇼군의 칭호는 줄곧 '일본국 대군'이었는데, 앞서 에도 막부의 쇼군은 조선에 보내는 국서에 '국왕'이나 '대군'이라는 직함이 없이 단순히 「일본국 원○ 」(日本国源 )이라는 서명만 사용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제대로 '일본 국왕'의 명의로 된 국서를 요구했고, 조선과의 무역에 의존하던 쓰시마 소 씨가 이 국서를 위조하여 「일본국왕」으로 고쳐 조선으로부터 무역 개시의 허가를 받아낸 이래 여러 차례 국서 위조와 조작을 행한 것이 간에이(寛永) 10년(1633년)에 발각되었다(야나가와 잇켄). 하지만 조선과의 사이가 다시 틀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던 에도 막부는 이를 계기로 조선에 대해 사용하는 칭호를 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때 칭호로 사용된 것이 《주역(周易)》에 나오는 '대군'이었다. 

 

大君有命,開國承家

대군(大君)이 명(命)을 받음이여, 나라를 열고 집안을 일으키도다.

 

武人爲於大君

무인(武人)이 대군이 되도다.

 

知臨, 大君之宜

지혜롭게 임함이니 대군의 마땅히 할 바로다.

 

 재계의 실력자나 거물을 의미하는 영어 타이쿤(tycoon)의 어원이 되는 '대군'은 원래 《주역》에서 운위된 문맥 모두가 '천자(天子)' 즉 황제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 뜻을 제대로 밝히고 쓴다면 쇼군 자신을 덴노와 같은 '황제'로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지만, 직접적으로 황제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고, 무인이 대군이 되었다는 말이 무사인 쇼군이 무사들을 거느리고 막부의 지배자가 된 현실을 잘 반영하였다고 여겼는지, 일본에서는 '대군'을 「일본국대군」으로써 쇼군이 조선에 대해 자신을 칭하는 칭호로 채택했다. 아울러 일본 연호의 사용도 전하면서, 간에이 13년(1636년) 조선 통신사 방문 때부터 대군호가 정식으로 사용되었다.

 

 이 칭호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 아라이 하쿠세키였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대군'이 조선에서는 국왕의 적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조선의 국왕을 향해서 쇼군이 '일본국 대군'을 자처한다는 것은 쇼군이 조선 국왕의 아들이 되는 꼴이라며, 쇼군이 덴노의 신하인 만큼 엄연히 '황제'인 덴노를 의식해서 대조선 외교에서의 쇼군의 칭호를 '일본 국왕'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일본 국왕의 '왕'을 작위로써 인식한 것이다. 

 

 쓰시마 후추 번의 유학자이자 대조선 외교의 실무 책임자였던 아메노모리 호슈는 쇼군의 대조선 외교에서의 칭호를 '일본국왕'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아라이 하쿠세키의 주장에 대해 반대했다. 호슈는 '왕'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군주라는 의미가 있으며, '가즈사'나 히타치 같은 지역명 또는 동쪽이나 서쪽 같은 방위를 붙일 경우 가즈사의 왕 또는 동쪽의 왕 식으로 그 지역에서나 행세하는 '자칭 왕'으로 허용해 줄 수도 있지만, '일본국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일본의 왕'이라는 뜻이 된다고 지적했다. 딱 떨어진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아메노모리 호슈는 '왕'이라는 호칭의 '작위'로써의 의미보다는 '지위'로써의 의미에 더 주목했다고 할 수 있다. 막부의 쇼군은 엄연히 일본이라는 '왕국'의 정당한 주권자인 천황 즉 '왕'으로부터 국가 권력을 위임받아 무력으로 통치하는 존재일 뿐이며 일본에서 '일본국왕'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엄연히 교토의 천황뿐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메노모리 호슈의 논리였다.

 

 막부는 아라이 하쿠세키가 중책을 맡고 있던 시절 '일본국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하쿠세키 실각 뒤에 다시  대조선 외교에서의 쇼군의 칭호를 '일본국대군'으로 되돌렸다. 이후 일본국대군은 일본의 개항 이후에까지도 쇼군의 칭호로 쓰였다. 그리고 막부가 사라진 뒤에는 비공식적으로 덴노를 가리키는 칭호로도 '일본국 대군'이 사용된다.

 

 사실 쇼군으로써도 일본국왕이라는 칭호가 마냥 달갑지도 않았던 것이, 쇼군이 '왕'이 되고 덴노가 '황제'가 되어 황제-(제후)왕의 구도가 성립될 경우, 일본이라는 왕국의 진정한 천자(황제)인 덴노가 행사해야 할 국정 운영권을 쇼군이 덴노로부터 횡령해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고대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는 권신들과 같은 존재임을 쇼군 스스로가 천하에 폭로하는 꼴이었고, '왕'이 '황제'보다 낮고 '일본국왕'인 쇼군이 '일본 황제' 덴노의 신하가 되는 것이라면 당연히 '''정치를 신하가 멋대로 할 것이 아니라 임금에게 돌려드려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일부 존왕주의자들의 주장 역시 힘을 얻게 되기 때문이었다. 막부의 권위가 높아지는 대신 반대로 위태롭게 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일본국왕'이라는 호칭 안에 들어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존왕주의자'들이 교토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몰려 있었던 곳이 미토이다.

 

존왕양이와 왕정복고의 대호령

 

 미토 학파는 에도 막부 말기에 '존왕사상'의 핵심으로 대대적인 막부의 탄압을 받아, 메이지 유신 직전에 이르러서는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https://dl.ndl.go.jp/pid/787948/1/9/

 

法令全書 慶応3年 -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出版者:内閣官報局, 出版年月日:明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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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막부 말기 서양 세력에 맞서 천황을 일본의 '국부'로까지 격상시키고 천황을 중심으로 단결해 일본을 지켜야 한다는 사상의 대표적 슬로건이었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슬로건은 미토학으로부터 나왔다. 중국의 고전인 춘추좌씨전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존왕(尊王)'의 대상 즉 왕을 '일본의 천황'으로 지목하였다. 존왕양이는 이후 글자 하나만 바꾸어 존황양이(尊皇攘夷)로 바뀌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존왕'이라는 단어나 왕이라는 단어 안에 일본 천황을 가리키는 의미가 사라진 것도 아니어서 에도 막부 말기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행한 뒤에 메이지 천황이 게이오 3년(1868년) 1월 3일 에도 막부와 기존의 섭정, 관백을 폐지하고, 삼직(三職) 즉 총재(総裁), 의정(議定), 참여(参与)의 설치로 천황이 중심이 되는 새 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선언 역시 황정복고(皇政復古)나 제정복고(帝政復古)가 아니라 왕정복고의 대호령(王政復古の大号令)이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옛 막부군과 충돌하던 시기에도 신정부군, 즉 덴노의 명을 따르는 군대를 가리켜 흔히 알려진 '황군(皇軍)'이 아니라 '왕사(王師)'라고 불렀다(『세 천황 이야기』(야스다 히로시 지음, 하종문·이애숙 옮김, 2009, 역사비평사).

 

奧羽の藩々の王師に 抵抗なしつるも

오우의 번들이 왕사(王師)에 저항 없이 포박되도록

- 『근세기문(近世紀聞)』(1873)

 

라고 해서, 옛 막부를 지지하며 신정부에 저항하던 무쓰 아이즈 번과 데와 쇼나이 번 및 에치고 여러 번들이 모인 이른바 '오우에쓰 열번동맹'에 대한 추토령(追討令)을 받은 신정부군을 두고 '왕사'라고 적고 있는 것이다. 『근세기문』은 쓰시마 후추 번 출신으로 메이지 초기까지 활동했던 언론인 겸 통속소설 작가 소메자키 노부후사(染崎延房)와 저널리스트 죠노 사이기쿠(條野採菊)가 1873년(메이지 6년)에 쓴 저술로, 본 대목은 신정부군과 막부군의 내전이었던 무진전쟁을 언급한 내용이다. 

 

 왕사는 중국의 고전에서 유구하게 '황제의 군대'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던 용어였다. 이미 은대 갑골문에도 나올 정도니 역사가 거의 3천 년을 넘어간다. 당나라 진자앙이 지은 시에

 

王師非樂戰

之子愼佳兵

왕사는 싸우기를 내켜하지 않는 것이니
그대 싸우자 덤비는 병사들 앞에 삼가 신중하소

 

라고 해서 거란의 봉기를 치러 가는 당의 관군을 진자앙이 '왕사'라고 부르고 있고, 신라의 최치원이 저술한 토황소격문에도 황소의 난을 진압하러 나선 고병의 군대를 '왕사'로 부르는 대목이 나온다.

 

 '황군'이라는 단어는 쇼와 시대 육군대신을 지낸 극우 민족주의 정치 사상가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처음 퍼뜨린 것으로 사실 전거가 없는 신조어다. 그는 일본서기에 진무 덴노의 이른바 '진무 동정'에 나오는 용어를 가져다 내세웠지만, 이건 '미이쿠사(みいくさ)' 또는 '스메라미이쿠사(すめらみいくさ)'란 일본어를 한자의 뜻을 빌려 적은 것이지 한자의 소리로 읽은 게 아니다. 한문은 무지성으로 휘황찬란하게 쓴다고 명문이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 전거를 갖춰서 써야 격식에 맞는다고 여기는데, 중국의 고전 어디에도 근거가 없는 용어를 가져다 쓴 것을 당시 사람들은 모두 기행으로 취급했다. 메이지 유신 뒤에도 왕사가 '천황의 군대'란 뜻으로 쓰였고, '덴노'를 왕이라고 부르는 것에 어떤 거부감이나 '비하'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전거에도 존재하지 않는 '황군'이라는 단어를 기행이라 비웃으며 항의하는 일본인은 없게 되었다. 

 이상을 통해 이미 일본 자국에서도 천황을, 심지어 천황 본인마저도(!) '왕'이라고 부른 전례가 몇 번이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확하게는 덴노의 자리와 그 일족, 나아가 덴노 자체를 가리켜 '왕' 혹은 '왕가', '왕위'라는 단어로 지칭하는 것을 격하나 비하라고는 여기지 않았다는 의미다. 일본에서 '천황'/'황'이라는 말은 굳이 '국왕/왕'과 구별되어 어느 쪽이 격이 더 높거나 낮다는 특별한 의미를 내포하며 평상시에 어느 한쪽만 쓰거나 어느 한쪽은 불경하다고 쓰지 않거나 하는 건 없었다. 오히려 일본 중세만 한정하더라도 일본이라는 왕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용어가 특별히 '천황'에 한정되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천황을 가리켜 '국왕', '미카도(帝)', '슈조(主上)' 등을 써서 불러도 문제가 없었다. '국왕'은 현실에 존재하는 직위로써 그 위치에 있는 사람을 가리켜 드러내는 말이었고, 그 사람에 대해 위엄을 더하는 표현법으로써 '천황'이라는 말이 쓰였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금중병공가제법도' 및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보아도 그러한 인식은 근세,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도 별 변화가 없었다.

 

황제라고 불러 준다고 다가 아니다 

 

 나무위키에 매달려 니트짓이나 하고 사는 어떤 사람은 "일본에서 사용한 왕은 독립국가의 군주로써의 왕이고 조선에서 사용한 왕은 중국의 제후국으로써의 왕이니 다르다고 구태여 일본의 왕은 지위로써의 왕이고 조선의 왕은 작위로써의 왕"이라고 우기려 하는데, 이는 일본의 왕은 지위로 해석하고 조선의 왕은 작위로 해석해야 한다는 지극히 편파적인 인식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언론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관련해서 계속 다루려 한다. 오랜만에 블로그 글을 쓰니 시간만 잡아먹고 남는 것이 없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것은 대외적으로 혹은 공식적으로 독립국의 국왕으로 자처했느냐 제후국의 번왕으로 자처했느냐의 문제보다는 국가 원수로써 그 통치권을 어느 정도까지 행사했으며 그 군주의 지배를 받는 인민들이 군주와 그의 왕권을 어떻게 인식했느냐가 조선 국왕의 성격(독립국의 군주냐 제후국의 번왕이냐)을 논함에 있어서 왕이니 황제니 하는 '공식적' 칭호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애초에 이름이 실제와 다른 사례는 동서고금 막론하고 얼마든지 있고, 황제라고 불렀다고 해서 정말 그 사람을 황제로 취급했느냐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동양의 경우만 놓고 보자면 금나라가 북송을 멸망시킨 뒤에 제나라라는 괴뢰 정권을 세워서 유예를 그 제나라의 '황제'로 세웠고, 일본 제국은 만주를 점령한 뒤에 옛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아이신기오로 푸이(선통제)를 데려다 그들이 만주에 세운 괴뢰 국가 만주국의 '황제'로 세웠다. 금나라나 일본 제국이나 모두 유예와 푸이를 '황제'라고 불렀지만, 금나라나 일본 제국이 그 '황제'들을 자국의 황제, 덴노와 동급으로 간주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대한제국에 그랬던 것처럼 만주를 점령하고 일단 겉으로만 독립국인 친일 괴뢰 정권을 세운 뒤에 차츰 흡수해 나갈 계획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 입으로 '황제'라고 부른 이들을 자신들의 황제, 덴노와 동급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이걸 두고 "어쨌든 왕이 아니라 황제라고 불렀으니까 격하한 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코미디일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