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oard.namu.wiki/b/report/2927950
요새 건국전쟁인지 뭔지,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김덕영이라는 사람이 만든 게 입소문을 많이 타는 것 같다. 영화에서 다룬 내용이나 주장들에 대한 비판과 반론이 잇따르고, 나무위키에서 그 비판과 반론들을 실은 문서 항목에 대한 삭제 요청이 들어오더니, 삭제 여부를 두고 토론이 벌어지나 싶다가, 황당하게도 토론에 외부 개입이 의심되어 토론이 중단되었다. 2024년 2월 19일 22시 38분. 토론이 제기된지 하루만의 일이다. 신고자는 디시인사이드에서 해당 글이 2월 18일 20시 30분에 기재되었고, 관련 토론 사실을 알리며 여기 가서 내용 작성하라고 소위 '좌표'를 찍은 게시글이 올라오고 21시 28분에 바로 해당 문서가 삭제되고 삭제 토론이 열렸음을 나무위키 신고게시판에 올렸다. 소위 '집단지성'이라는 것도 쉽게 말하면 몇 사람이 모인 여론조작에 불과할 뿐이라고, 나무위키도 결국 그렇고 그런 '떼법'들의 집합소일 뿐이라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https://youtu.be/IbZ0-KCCpQ4?t=1248
나는 진중권을 별로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지만, 뉴라이트 우파들에 대한 비판만큼은 그와 입장을 같이한다. 무슨 건국전쟁인지 뭐시깽이인지 하는 영화에 대해서 "영화감독들 이런 쓸데없는 것 좀 만들지 말라"고 일축한 진중권의 일갈이 시원했다. "'국부'라고 하는데 니들 아버지 하세요, 내 아버지 하지 말고. 자기 아버지로 모시고 싶으면 뭐 제사라도 지내든지, 그래야지 왜 이걸 갖다 자꾸 모두한테 강요를 하게 되는 겁니까? 아버지 한 명 있는 것도 피곤한데 왜 두 명씩 부르라고 그러는지."라는 멘트 보니까 아, 이 어르신 아직 안 죽었구나 싶어서 한동안 웃었다. 아직 시원함을 말할 계절이 아닌 줄은 안다.
이걸 건국전쟁의 감독 김덕영이 해명글이랍시고 써서 반박했다. 그걸 요약하자면
1) 내가 알아보니까 3·15 부정선거는 이 전 대통령 측근들의 권력욕에서 비롯된 사건이지 이 전 대통령의 잘못은 아니더라.
2) 역사수정주의는 잘못된 가설과 근거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나도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3년 반의 시간 동안 나름 열심히 이승만과 그를 둘러싼 시대를 공부했다.
3) 나 역시 개인적으로 4·19로 인해서 희생된 숭고한 영혼들에 대해서 마음 깊이 안타까운 심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건국전쟁은 4·19의 헌법정신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직접 지시하지 않았으니 아무 책임이 없다는 논리는 온당한가
우선 1)하고 3)부터. 김덕영은 자신이 4.19 정신을 부정하지 않았다며 "3.15 부정선거가 기왕에 알려진 것처럼 이승만이 기획하고 획책한 것이 아니라고 '팩트'를 바로잡는 것"이 영화의 목적이고 4.19 정신의 회복이라며 자신의 논리 프레임을 짜고 있다. 어차피 이승만이 당선될 것은 정해져 있었으니 굳이 이승만이 부정선거까지 지휘할 필요가 없었다고, 그리고 이승만에 대한 이런 부정한 면모를 자꾸 퍼뜨리는 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북한의 획책에 동조하는 주사파들이라는 뉴라이트 우파들의 주장을 거의 재탕한 내용이고, 그의 해명글에서 이승만의 재평가를 요구하는 근거라고 든 것은 이게 다였다.
백 번 양보해서 이승만이 직접적으로 3.15 부정선거를 지시한 적이 없다 한들, 대통령이자 자유당 총재로서 이승만에 대해 자유당 차원의 조직적인 선거부정에 대한 간접적인 책임이나 이후의 상황 파악 및 대처까지 옹호할 수는 없다.
이승만은 1960년 2월 13일, 그러니까 정부통령 선거 직전 '긴급담화'를 발표했다. 일명 2.13 담화라 불리는 이승만의 긴급담화는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제1공화국의 내무부장관으로 3.15 부정선거의 총지휘자로써 처형된 최인규는 법정에서 이승만의 이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왔음을 고백하기도 했다(학민사 편집부 편, <혁명재판>, 학민사, p39).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자유당 간부들을 비롯해 제1공화국 내각 인사들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압박이 들게 하기 충분했다. 이승만이 직접 3.15 부정선거를 지시한 것이 아니라고 백 번 양보해서 그렇게 봐 준다고 쳐도 이승만 본인이 간접적으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사태에 '불씨'를 던진 책임 역시도 물을 수 있다는 얘기다.
당장 그렇게 자유당 내부 이승만 측근들이 저지른 선거부정인 3.15 부정선거를 '선거부정'이라 항의하며 들고 일어난 마산에서의 시위조차 이승만은 그 항의의 대상이 자유당 정권의 선거부정이며 시위의 가장 큰 1차적 원인이라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정당 싸움"이라고 일축해 버렸고, 4.19 혁명 엿새 전인 4월 13일에는 이런 내용의 담화를 내놓는다.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주게 할 뿐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며, 또 지방경찰은 각각 그 지방의 정돈을 지켜서 혼잡이 없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
동아일보 1960년 4월 14일자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군중의 시위를 '공산당이 배후에 있다는 혐의가 있다', '이런 시위는 공산당들 좋은 일만 시킬 뿐이다'라고 발언하는 것은 요즘으로 치면 종북몰이라고 할까, 사태의 원인이나 인과 관계를 전혀 파악 못하는 것도 모자라 이러한 시위 자체를 공산당의 선동으로 취급하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 인식은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대중을, 자신과 자유당에 대해 항의하는 대중의 시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었는지조차 의심하기 충분하다. 딱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가 이런 태도로 나오더니 결국 탄핵이 인용되었고 파면되었다. 3.15 부정선거의 최종 책임 여부를 떠나 이승만의 당시 정국을 보는 눈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시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언행의 불일치 - 4.19 헌법정신을 부정하지 않는다면서 이승만을 재조명한다는 것
"왕이 무죄가 된다면 혁명이 유죄가 된다."
-생 쥐스트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고 하는 고사성어는 풀이하면 '양머리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는 얘기다. 춘추전국시대 어느 왕이 궁녀들 남장을 좋아해서 온 나라 여자들이 그걸 따라서 남장을 하고 다니니 왕이 금령을 내리라고 하자 신하가 "그럼 궁중에서 궁녀들 남장부터 금지시키세요. 양 머리 걸어놓고 개고기 파는 짓 하지 마시고."라고 일침했다는 고사.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3)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김덕영은 자꾸 이승만에 대한 '왜곡'을 바로잡아야 하며 왜곡을 바로잡는 게 불의를 바로잡는 것이고 그런 자신은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을 부정하지 않는다고 앵무새처럼 말하는데, 김덕영이 자기 입으로 '부정하지 않는다'고 말한 '불의에 항거한 4.19의 헌법정신' 자체가 단순 장기 집권이 아닌 독재에 대한 정권의 야욕과 이를 실현하려는 정당 차원의 온갖 불법적이고 부정행위들에 대한 시민으로써의 항의이고, 그런 불법적이고 부정한 행위를 장기독재의 목적으로 정당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자행한 자유당 정권의 최종 책임자라고 할 이승만의 대통령 장기 집권 시도 및 이를 위해 자유당 정권이 조직적으로 자행한 온갖 편법과 부정선거, 나아가 이에 항의하는 시민과 학생들에 대한 폭력 진압(김주열 열사 사망사건)에 대한 전국적인 항거로 이어져 기어이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을 끌어내리는 것으로 결말을 보게 된 사건인데, 그 4.19 혁명으로 시민들에 의해 밀려난 이승만에게 책임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를 끼고 선거부정을 저지르고 민주주의 헌정질서마저 위협하며 이를 항의하는 군중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부도덕한 정권을 대대적으로 봉기해 끝장낸 4.19 혁명의 정당성 역시도 도전을 넘어 부정당하게 될 위협을 피할 수 없다. 진중권이 문제점으로 지적한 뉴라이트식 역사수정주의가 이 지점이다.
자유당 정권 시기 선거와 관련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부정행위는 3.15 부정선거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일례로 1956년 5월 17일에 있던 정·부통령 선거에서도 폭력단이 야당 참관인을 축출하거나 괴한이 유권자의 투표용지를 빼앗아 대리투표를 하는 등 공공연한 선거부정이 속출했다. 또한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자유당의 선거 운동원들이 지방 주민들을 상대로 "이 동리에서 만약에 야당계(민주당) 표가 나온다면 이 동네는 몰살을 해버린다"라고 협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출처: 조봉암과 1950년대 (하)/서중석 지음/역사비평사/1999년/796쪽). 3.15 부정선거는 단지 그렇게 이어져오던 일련의 사건들이 쌓인 끝에 정점에 달한 순간이었을 뿐이다.
감성팔이 - 총 맞고 병원에 실려온 학생들 문병 왔는데, 어쩌라고?
김덕영은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 민경우의 발언을 가져다 4.19가 일어나고 4일 뒤에 이승만이 부상당한 학생들을 위로하러 서울대병원을 방문했다며 "어느 독재자가 자신의 쏜 총에 맞은 학생들에게 자신의 쏜 총에 맞은 학생들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위로의 마음을 전달하겠는가. 그 자체만으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하는데, 애초에 자유당 정권이 3.15 부정선거를 기획하지 않았으면 그 학생들이 '부정선거 다시 하라'고 시위 일으키지도 않았고 총 맞아 병원에 실려올 일도 없었으며,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 박힌 시체가 되어 바다에 던져질 일도 없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41104131700052
마산에는 지금도 무학초등학교 옆에 3.15 당시 총탄 자국 벽을 복원해 두었다. 원래 벽은 헐려 사라졌고 벽에 총을 쏴서 총탄 자국이 있었다는 증언들을 토대로 복원한 것인데, 한 마디로 초등학생들이 대다수였을 초등학교에까지 총질을 해댔다는 얘기다.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마산에서의 시위도 '정당 싸움'이라고 일축해 버리면서 자유당 정권이 조직적으로 저지른 부정선거가 원인이라는 기본적인 인과관계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경찰이 초등학교에까지 총을 쏴대거나 말거나 담화랍시고 "요새 일어나는 일련의 시위들이 그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더라" 식의 말이나 하던 사람을, 시위하다 총 맞은 애들 문병 온 것 가지고 독재자라고 볼 수 없다고 두둔하려 하는 것은 명백히 인과관계를 왜곡한 오류이자, 전형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이다. 분명히 시위 발발의 최종 책임이 요구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나는 몰랐다는 식으로 이미지 세탁을 하러 나오는데 그걸 가지고 감격하면서 '이것만으로도 이승만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운운하는 게 얼마나 사리에 맞지 않는 일인가.
여기서 김덕영의 발언으로 정리된 2)의 비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김덕영은 진중권의 역사수정주의 운운하는 비판에 대해 "역사수정주의란 잘못된 가설과 근거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나도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3년 반의 시간 동안 나름 열심히 이승만과 그를 둘러싼 시대를 공부했다"고 항변했다. 작품이 드러낸 사관의 문제점과 사실 관계의 오류 및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나도 나름 공부 많이 했거든"이라고 받아치는 말은 전형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앞서 2019년에 영화 봉오동 전투를 발표한 영화감독 원신연도 마찬가지로 영화와 관련해 고증 및 실제 사실관계 측면에서 지적되는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들을 일관되게 "시대적 배경에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고증에 맞춰서 촬영했다"고만 주장해 빈축을 산 바 있다. 역사강사 황현필은 "교과서에 정확한 문장 한 줄 넣기 위해 평생을 매달리는 학자들도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3년 남짓 공부해서 영화를 만들수 있다면 전문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할 필요가 사실상 없다. 그냥 관련 책만 주구장창 파서 만들면 되니까.
창작하는 입장에서 서사 자체의 부실함이나 미흡함을 사회 구성원들이 특정 집단에 대해 품은 불만과 분노를 해소하고 대리만족하기에 알맞은 자극적인 메시지 또는 그럴듯한 주제의식만으로 메우려 드는 '계몽주의적' 작품과 창작자는 동서고금, 좌우보혁을 막론하고 어디에나 존재한다. 아마, 아니 분명히 나도 그 중 한 명이었을 것이다. 역사를 소재로 하는 작품도 그러한 경향에 쏠리기 쉽다. 실제로 있었던 역사를 소재로 다루는 이상 저자의 역사 인식에 대한 지적이나 비판은 당연히 나오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 인구 수대로 존재하는 게 사람의 사고 방식이라는데 하나의 사건을 두고 얼마든지 보는 관점은 다를 수 있고, 그런 작품들도 수요가 있다.
역사를 소재로 창작을 하는 경우 (영화 명량에서 그랬는데) '애국 마케팅'이라는 이름으로 작품 자체의 미흡함, 서사의 부실함을 대충 때우려 든다는 불편함을 호소하며 어떤 사상이나 주제의 그럴듯함이 작품 자체의 부실함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해 왔고, 그렇게 하는 창작자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실제 역사와 그 역사를 다룬 영화를 분리해서 보는 분들도 계시고(그분들께 부처님의 가피가 있기를) "나는 이것이 어디까지나 소설로 읽혀지기를 바란다.", "역사적 사실은 모티브로만 삼았을 뿐 본작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창작이며 사실과 부합하는 점이 있어도 우연이다"라고 선을 긋기도 한다.
김덕영은 그런 차원에서 허용될 영역을 진작에 넘어섰다. 본인이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왜곡을 팩트로 바로잡겠다"고 나선 이상 그가 자신의 작품에서 내세운 '팩트'가 어디에 기초하고 있는지에 대해 관련 전공자에 의한 검증을 결코 피할 수 없으며, 적어도 그 검증을 요구하는 이들에 대한 대답이 "나도 공부 많이 했다"로 옹호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시니컬하게 말하자면 팩트를 바로잡겠다면 다큐멘터리 영화가 아니라 논문을 쓰셨어야지. 차라리 그건 편향적일지언정 '학문'으로는 인정받았을 것이다. '예술'은 몰라도. 그러고 보니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이런 말을 했다. "예술가로써 실패하는 것은 다른 어떤 분야에서 실패하는 것보다 더 비극적 일이다."
적의 적은 나의 친구일까 -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정치를 너무 만만히 보지 마시오.
전쟁터에서는 적군과 아군의 구별이 분명하지만, 조정이란 것은 그렇지가 않아요.
이 사람의 적이라고 해서 반드시 대감의 편이 되어 주지는 않습니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김덕영의 해명글을 보면 "북한에서는 왜 '이승만 괴뢰도당' 운운하며 그토록 이승만을 비방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한다. 보수 우파 중에는 한국에서의 이승만에 대한 비판을 두고 "북한은 이승만 지우기를 시도하고 그것은 곧 남한의 주체사상파가 받드는 핵심 논리가 되었으며, '이승만 지우기'를 부추겨서 '남한이 문제가 있었다'고 보이게 하고 남한보다 체제 우월성과 정당성을 독점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두둔하는 사람들이 좀 보인다. 북한에서 이승만 괴뢰도당 운운하는 게 김덕영 본인에게는 그리도 이승만을 빛나 보이게 하는 무슨 마법이었던가. 신기하게도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른 의미로 종북(從北)의 마수에 홀려 있다는 생각이다. 북한이 칭찬하는 사람은 모두 국가안보 위협의 소지가 있는 잠정적 또는 심정적인 주사파이고, 북한이 비난하는 사람은 모두 국가 안보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대들보이고 서까래 같은 사람으로 포장되는 그런 묘한 마법. 그렇게 북한의 한 마디에 일희일비한다는 점에서는 대북정책에 있어서 온건하고 우회적인 접근을 주장하는 이들을 '주사파'라 욕하는 이들과 그에 동조하는 이들 역시도 또다른 의미의 '종북'이라는 생각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주사파도 종북도 아니다. 전원책 변호사님 말대로 광화문 광장에서 김일성 개XX 욕해보라고 하면 얼마든지 욕할 수 있고, 개신교에 대해서는 치를 떠는 내가 개신교 사상의 변종인 주체사상에 빠질 일은 단언컨대 없다. 김덕영은 이승만의 실정에 대한 비판을 자꾸 북한과 결부지어 생각하려 하고, 그것이 도리어 그의 논리가 얼마나 허술하며, 보수 우파들의 주장을 앵무새같이 받아 섬기고 있다는 폭로인가를 보여준다. 이승만의 과오에 대한 비판 자체를 용납하지 않고 싸그리 '이승만 지우기'로 몰아가려 드는 전형적인 물타기 논리이자 흔해빠진 종북몰이의 한 종류일 뿐이다. '이승만 지우기를 주장하는 것은 북한 정권의 주장에 찬동하는 것'이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얘기다.
김덕영은 북한이 이승만더러 '이승만 괴뢰도당' 운운하며 이승만을 비방하는 것을 뭔가 대단한 것처럼 보는 모양인데, 애초에 북한이 남한의 붕괴와 적화통일을 획책하는 것이야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닌 정권 수립 이래의 희망사항이고, 당연히 남한의 정부 수반에 대한 비판과 평가절하를 일삼는 것은 이승만에 대한 호불호와 상관없이 당연한 일이다. 그걸 가지고 이승만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삼으려 들거나 "우리의 주적이 욕하는 인물이면 당연히 우리는 영웅으로 모셔야 한다"라는 투의 이분법적 흑백논리를 무조건적으로 들이밀 근거는 되지 못한다.
https://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255.html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58
애초에 이승만의 과오를 비판하고 그의 독재 행적을 비난한 이들 중에 이승만의 독립운동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는 이들도 많다. 이승만의 과오 가운데 하나인 친일청산 문제만 놓고 보더라도, 김덕영에게 영화 제작을 지원한 트루스포럼 같은 뉴라이트 우파 지지자로부터 걸핏하면 '종북좌파'라고 까이는 한홍구 선생은 "친일파 청산의 좌절은 우리의 현대사의 잘못 끼운 첫 단추라 하겠지만, 그럼 친일파 청산에서 남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철저했던 이북은 아무런 문제가 없나? 친일파 청산만 했다고 우리의 모든 문제가 다 풀렸을 것인가?"라고 선을 그었다. 광복회 회장을 지낸 김삼웅도 <독부 이승만 평전>에서 이승만을 분명하게 독재자로 규정하면서도 그의 젊은 날의 반일 언론 활동이나 개혁적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40319
"북한이 이승만을 부정하고 있으니 남한에서 이승만을 부정하는 사람은 곧 북한을 추종하는 자들이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자들이다"라고 하는 말은 뒤집어 말하면 "이승만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만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지키는 자들"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승만을 부정한 이들 가운데 '''우파 일각에서 거의 반신반인으로 모시다시피 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럼 박정희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한 사람이 되느냐'''는 반문도 충분히 가능하게 된다.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1816
박정희는 이승만을 철저히 외면했다. 4.19 당시 군인들은 자유당 정권을 수호한 것이 아니라 시민을 지지했는데, 이는 제1공화국 시절 군인들의 열악한 처우도 한몫했다고 지적된다. 자유당 정권은 미국의 무제한 원조를 바탕으로 소위 삼백산업이라고 해서 밀가루, 설탕, 면화 세 가지의 제품만 생산하는 제3세계 독재국가들이나 할 법한 경제 정책을 실행했는데, 급격한 발전과 별개로 자유당 정권은 이때 나오는 이익을 기존의 지주 계층들이나 자신을 지지하는 깡패들에게 분배하였고, 공무원과 군인들의 봉급은 쥐꼬리만 한 수준으로 적어서 각종 비리와 부정부패를 저지르지 않는 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턱없이 부족했다.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뒤인 1960년 8월 16일 경향신문에 정변에 대한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을 무능하고 부패한 이들이라 비판한 것뿐 아니라, 본인이 저술한 <우리 민족이 나아갈 길>에서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썩어 문드러진 자유당과 관의 권리를 중심으로 한 해방 귀족이 날뛰었다!"
라고 이승만을 깠다. 박정희 정부 시기 김구의 재평가와 함께 여러 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여 건국훈장을 수여했지만 이승만에 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았고, 박정희 사후 7년 간 더 이어진 제5공화국 전두환의 군사정권 시기의 문교부와 노태우 정부의 교육부에서 만든 국정 역사 교과서에서도 이승만은 독재자였다.
"그(이승만)에겐 동정할 여지가 전연 없소. 12년이나 해 먹었으면 그만이지
四選(사선)까지 노려 부정선거를 했다니 될 말이기나 하오?
우선 그, 자기 아니면 안 된다는 사고방식이 돼먹지 않았어요."
- 소설가 이병주, 부산일보 주필 황용주와 가진 자리에서,
이병주 지음 <대통령들의 초상> 서당, 1991년 9월 1일 출간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19950116002001
4.19 이후 하야하여 하와이로 간 이승만이 한국으로 귀국하려는 움직임을 "귀국을 고집하면 그와 프란체스카 여사의 여권을 취소하라"고 호놀룰루 영사관에 지시한 것도 박정희다. 결국 이승만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하와이에서 생을 마쳤다. 이승만의 장례식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았다. 정일권 당시 국무총리가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추모사를 대독했고, 여기에는 '독립운동의 원훈이요, 건국 대통령'이라는 문구가 들어있긴 했지만,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는 배나TV의 장원재와의 인터뷰에서 정일권 당시 총리가 박 대통령에게 "조사를 어떻게 하시겠느냐"고 물었을 때 박 대통령은 "마음대로 쓰라"고 넘겨 버렸고, 이은상에게 부탁해서 조사를 쓰게 되었다고 증언했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publishDate=1965-07-23&officeId=00023&pageNo=1
집권 시에 무슨 악독한 짓을 해도 해가 가고 세월이 흐르면 잊어진다는 나쁜 전통으로 국가와 사회기강을 흐리게 하여,
만일의 경우 그에 기대고 싶은 저의라도 없는 한, 국무회의는 문학소년 같은 감상을 단호히 버려야 한다.
-조선일보 1965년 7월 23일자 1면 사설 '지금이 자유당 천하인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65072300239102012&officeId=00023
(전략)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영웅적 망상에 사로잡혀 국민 앞에 사죄는커녕 지배자적 독선의 꿈을 깰 줄 모르고 무리한 동정을 구하는 듯 국군 묘지에 묻어달라는 진정을 하였던 것을 보면 거기에 정치적 복선이 결코 없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국민은 이 박사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우둔하거나 어리석지는 않다. 인간에게는 동정이 있어도 역사에는 동정이 있을 수 없다. 이 박사는 악정의 통수자로서 불의, 부정의 책임자다. 더구나 민의에 의한 혁명에 도괴된 정부의 제일인자이며, 스스로 도망했던 책임의 회피자이다. 수백, 수천의 생명을 빼앗고 젊음을 불구로 만든 간접살인자였다. 이러한 사람에 대하여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지나친 관용을 보인다는 것은 오로지 후진한국의 분별없는 역사의식이요 낙후된 민족의 자기 모독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 같은 날짜, 4면 '再考(재고)되어야할 李博士葬禮(이박사장례)'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그에 대한 비판은 조선일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 글들은 조선일보를 비판할 때마다 꼭 한 번씩 불려 나온다. 그때의 조선일보와 지금의 조선일보는 서로 말이 통하기는 하느냐는 비아냥으로써. 즉 "이승만에 대한 비판은 북한에서 하는 이승만 지우기이고 이승만을 비난하는 사람은 북한에 동조하는 주사파들이다"라는 김덕영의 주장은 "북한에서 광주항쟁을 그토록 칭찬하니 광주항쟁은 북한의 사주로 벌어진 일이다"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흑백논리에 불과한 허술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친일몰이의 원조는 이승만
https://shindonga.donga.com/society/article/all/13/105895/1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1508100014#google_vignette
하도 '알지도 못하면서 뭐라고 하지 말라'는 식의 말들이 많아서 이승만에 대해 알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느낀 것은 이승만 이 사람 생각보다 일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었고, 생각보다 훨씬 졸렬했다는 점이다. 반민특위 해산은 이승만이 벌인 최고의 업적이고, 아울러 '친일몰이'의 원조로써 한국의 친일적인 일부 논자들이 말하는 '반일'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든 최초의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었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조선인민군이 쳐들어와 서울을 사흘 만에 내 주고 부산으로 쫓기다시피 내려온 상황에서 이승만은 일본의 한국에서의 전쟁 참전만은 반대했다. 세간에는 미국이 일본도 연합국에 포함시켜 북한과 싸우게 하자고 했을 때에 "그랬다간 총부리를 북한군이 아니라 일본군에 돌려 버리겠다"고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한국일보 기자 출신인 박실(朴實) 전 의원의 《벼랑 끝 외교의 승리》(청미디어)에 실린 일화이다. 부산에서 육군병원에 문병 갔다가 한국어를 잘 못하는 부상병을 발견했는데, ‘일본에서 온 군인들이라 그렇다’는 설명에 미국이 자신도 모르게 일본 군인을 참전시킨 것이라고 오해한 이승만이 “미국이 일본인을 미군에 넣어 참전시켰는데, 우리는 공산군과 싸우던 총부리를 일본으로 돌려 싸우겠다”고 한 발언이 저렇게 전해진 것이다. 나중에 가서 그 부상병은 일본 군인이 아니라 교포(자이니치) 출신 의용병임이 밝혀졌지만, 당장 북한군을 코앞에 둔 상황에서 일본군이 미군에 끼어 한국 땅에 와 있다는 오해만으로 저런 반응을 보였을 정도니 이승만의 반일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때문에 반민특위 해산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이승만 지지자들이 내세우는 반박으로도 많이 쓰인다.
그리고 그 반일을 이승만은 정치적으로도 충분히, 아주 졸렬하게 잘 써먹었다. 1952년 5월 임시 수도 부산에서 이승만은 장기 집권을 목적으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개헌을 야당 의원을 감금한 뒤에 강행했다. 부산 정치 파동이다. 임시수도 부산에 '비상 계엄'을 선포,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에게 전방부대 1개 사단을 부산에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1952년이면 아직 북한군과 정전협정도 맺지 않은 한창 전쟁 중일 때의 일이었는데 전방 1개 사단을 빼서 부산으로 보내라는 목적은 분명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에게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게 하겠다는 공포 분위기 조성이었다. 이종찬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군대는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이승만의 병력 배치 명령을 거부하고, 더 나아가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한 이른바 육군본부 훈령 217호를 전 육군에 하달한다.
https://db.history.go.kr/id/dh_025_1952_05_27_0050
이종찬이 병력 배치 명령을 거부하자 이승만은 결국 헌병대를 동원해 따로 부산으로 병력 동원을 명령하고, 이종찬을 총장에서 해임했다. 이종찬이 해임되기 얼마 전에 부임해 온 신임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앞에서 이승만은 한국군 장군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인사시키는 와중에 이종찬을 두고 "이 사람(이종찬)의 할아버지가 한일합방 때 도장 찍어 나라 팔아먹은 양반"이라고 소개했다. 이종찬의 면전에서 말이다.
정작 이승만 본인이 반민특위를 억지 해산시켜가며 친일파들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은커녕 오히려 정부 요인으로 중용한 것을 생각하면 이종찬에게 행한 것은 빼도박도 못할 이율배반이고 내로남불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이종찬 본인은 할아버지 이하영의 친일 행적으로 일본 제국에서 고위 귀족이 되고 일본군 장교로 있으면서 집안의 작위를 세습하기를 거부했고, 해방 뒤에는 "일본군에 부역한 민족반역자인 내가 무슨 염치가 있느냐"며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친일 행적에 대해 반성하고 자숙하는 모습을 보였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반민특위를 억지 해산시키고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중용했으면서 정작 일본에 대해서는 극구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고, 장기 집권을 위한 발췌 개헌을 강행하면서 반대파를 찍어 누르려고 전방 사단을 동원하려다 이를 제지한 이종찬에게 보인 졸렬한 작태를 보고 나는 이승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감이 얼추 잡혔다. 이 사람은 민주주의 공화국의 대통령이라기보다는 왕정 시대의 군주에 가깝고, 친일이든 반일이든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하고 자신의 명령만 맹목적으로 따를 수 있는 사람을 원했던 것이고, 그 목적은 명백하게 자신의 권력에 대한 지지를 잃지 않는 데에 있었다.
독립운동가로써의 행적은 정치인으로써 이승만에게는 분명하게 대통령이라는 지위를 유지할 정치적 자산임에 틀림없고, "일본군을 한반도에 상륙시켰다간 그날로 총부리를 일본군에 돌려 버리겠다"는 강경한 발언도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승만에게는 당연한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반민특위 억지 해산에 조선인민군에게 서울 뺏기고 부산까지 쫓겨 내려오더니만 이젠 자력으로 맞설 힘도 없어 일본군까지 다시 불러 들이려 든다"는 비판은 이승만 본인이 가진 강력한 정치적 자산 가운데 하나인 '독립운동가'로써의 행적마저도 무위로 돌릴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반민특위 억지 해산에 대한 비판이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반공'에 더해 '반일'을 어필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끝까지 버리지 못한 권력욕
1990년에 '제1공화국 국무회의'라는 제목의 특별기획으로 당시를 취재했던 경향신문은 애초에 1948년 정부 수립 초기부터 야당 육성에 관심을 표명한 이승만이었지만 야당의 세력 확장에는 적지 않은 불안을 느꼈고, '국부'로서 초연하게 자리를 지키며 존경받고 싶다는 본심 한편으로 야당에 정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도 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으며, 야당을 대하는 야당관(觀)에 있어서 이승만은 "야당은 아무리 생각해도 글렀어", "결국 내가 아니면 안 돼" 식의 자기중심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야당에 정권을 넘겨준다'거나 '자유당 안의 다른 누구를 자신의 정치적 후계로 삼겠다'는 구체적인 구상도 없었다고 평가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5/08/07/2005080770248.html
이승만과 김구 모두와 친분이 있었던 이을식은 2005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51년 자신이 전남도지사가 되었을 때 이승만이 부산 정치 파동, 그러니까 피란수도 부산에서 대통령 연임을 위한 직선제 개헌을 시도, 강행할 때 이승만을 찾아가 "초대 대통령만 하시고 (물러나서) 조지 워싱턴처럼 국부 노릇만 하시라"고 진언했으나 이승만이 화를 냈고, 하야할 때까지 다시는 이승만을 만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유학자로 임정 요인이었던 심산 김창숙은 이런 이승만의 "나 아니면 안 된다"식의 권력 지향적이고 독선적인 사고방식을 두고 그를 '독부(獨夫)'라고 불렀는데, 맹자가 주 무왕에게 쫓겨난 상의 폭군 주왕을 가리켜 부른 말이 '독부'로 '인심을 잃어 잔적(殘賊) 즉 의와 인에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된 한낱 필부'라는 뜻이다. 이승만은 훗날 망명지 하와이에서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소식을 듣고 "그래, 박정희. 그 사람이 잘하고 있다더냐?"고 물었고, 측근들이 "뭐, 그럭저럭 한답니다."라고 대답하니 "한답니다'란 애매모호한 말을 믿을 수 없다. 내가 4.19 혁명 때 '그렇다고 합니다'란 말만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경향신문에서 내놓은 분석과도 비슷하다. 이런 류의 지도자를 보통 역사에서는 암군(暗君)이라고 부른다.
4.19 혁명으로 하야를 선언한 뒤에도 이승만은 끝내 대통령직에 대한 미련과 권력욕을 버리지 못하는 답답한 모습을 드러냈는데, 김정렬의 회고록에는 하야를 선언한 바로 다음날인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사임서에 사인하지 않고 하야를 거부했다고 한다.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도, 허정이나 김정렬이 나서서 서명하라고 해도, 이승만의 대답은 "내가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지금 물러나셔도 질서 확고하게 유지됩니다"라고 역설하고서야 사임서에 사인을 해서 이승만의 대통령 사임서는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김정렬, '항공의 경종 : 김정열회고록', 을유문화사, 1993년, p268~269). 본인 입으로 하야를 선언한 뒤에도 여전히 권력에 집착했던 모습은 과연 이승만이 4.19 혁명이 어떻게 발발했는지 반성이 있었는가, 4.19 혁명에 참여한 군중의 항의를 두고 "그런 불의를 보고도 항거하지 않는다면 그게 이상한 것"이라고 발언한 말의 진의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하기 충분하다.
원천봉쇄의 오류 - 영화를 안 봤으면 닥치라는 어느 '꼰대'의 말씀
https://www.artive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36
그리고 어디 전한길이라는 한국사 강사분께서 건국전쟁 봤다고 인증샷 올려놓고 "특정 편향된 자칭 역사 전문가라는 편향된 논객들이 자기들이 모든 것을 아는 양, 독자나 국민들을 가르치려 들지 마라."라고 하더니, 참 당당하게도 본인 유튜브 채널에 "편향된 영화 보지 말라고? 내 맘이야"라고 써서 영상 하나 올리셨던데, 전한길 강사님, 이렇게 내 블로그로 당신 그 같잖은 태도, 꼰대 같은 헛소리 까는 것도 내 마음이니까 괜히 주워듣고 명예훼손으로 신고하겠다느니 하는 말씀 하지 마쇼. 어차피 듣지도 않겠지만. 보니까 강의도 최태성처럼 스무스하지도 않고, 구독자수는 같은 한국사 강사하는 황현필의 반따리도 안 되는 주제에 꼴에 강사랍시고 우격다짐으로 나대는 게 같잖아서 참. 아니 똑같이 곤밥 먹고 쉰소리 하는 양반들끼리 차이가 나도 이렇게 나는지 모르겠다.
김덕영도 진중권에게 똑같은 소리를 했다. "아직 영화를 안 보신 것 같은데 와서 보면 내가 이 영화를 왜 만들었는지 이해할 것"이라고. 진중권은 디워 논쟁 때에도 "내가 그딴 쓰레기를 왜 보냐"라며 딱 잘랐던 사람이다. 어차피 영화가 무슨 소리하려고 만든 건지, 무슨 문제점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아는데 그걸 가지고 '니가 영화를 안 봐서 잘 몰라서 그래' 혹은 '영화를 안 봤으면 입 닥치라' 식의 우격다짐을 두고 보통은 원천봉쇄의 오류라고 부른다. 어떤 개인 내지 집단에 대한 문제점과 과오를 지적하는데 그걸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일축해 버리는, 감독으로써 영화의 문제점과 미흡함을 지적하는데 그런 목소리를 두고 "영화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운운하며 영화에 대한 비판이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까지 싹 다 "특정 편향된 자칭 역사 전문가"라고 몰아버리는 것도 영화를 안 보고 혹평하는 것만큼이나 꼰대같은 짓거리임에 틀림없다. 당장 수강생들의 반응도 "정치적으로 편향되지 않는 것이 좋다", "한길쌤 의견이 중도인 것 같다"는 평과 "자국민 학살한 사람한테 공과를 따지는 것 자체가 편향이다", "노무현, 김대중 다큐도 보고 똑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느냐", "히틀러보고 정치 잘했다고 칭찬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엇갈리는 걸 보면, 다들 전한길만 싸고 도는 것도 아닌 모양이라 다행이다.
누구는 "그러는 황현필 너도 길 위의 김대중은 보고 와서 리뷰까지 해 놓고(본인이 돈 주고 표 산 건 아니고 시사회 초청받은 모양이다) 건국전쟁은 볼 가치도 없으니 보지 말라고 하는 게 형평성이 맞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한국사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전한길의 저 꼰대짓도 "어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무엇이 문제점이었고 무엇이 비판받을 점인지를 관련 자료를 찾아 조사하고 자기 머리로 생각해 판단하는 과정에서 이런 영화도 한 번 접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일 것이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역사 공부 입문하는 사람도 많고, 나도 그 중 한 명이다. 그런 점에서 황현필의 태도도 마냥 좋은 태도라고 보기는 어렵겠다. 전한길 본인은 변호인이나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다 봤고 길 위에 김대중도 볼 예정이라고 썼는데, 전한길 본인이 '봤다' 혹은 '볼 예정이다'라고 언급한 영화 가운데 '관람 인증샷'을 올린 것은 건국전쟁이 유일하다. 황현필 유튜브를 보니 처음에 건국전쟁 리뷰해 달라는 요청에 "내가 그걸 보고 느낄 역겨움은 누가 감당하라는 거냐"라고 썼다가 나중에 다시 "똥통에 발 담그는 심정으로 가서 보고 오겠다"고 썼는데, 모를 일이다. 보고 와서 "내가 이승만을 잘못 알고 있었다. 이승만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부로 칭송받아 마땅하다"라고 사람이 바뀌어서 올지? 마찬가지로 전한길도 본인 입으로 변호인, 남산의 부장들, 서울의 봄 봤다는 말이나 길 위의 김대중도 볼 예정이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봤다고 입으로야 누군들 못할까.
난 굳이 내 돈 내 가면서 저런 영화를 볼 생각이 없다. 진중권의 말처럼 애초에 내용이 너무 뻔하기도 하고, 저것보다 더 재미있고 의미있는 영화가 쌔고 쌨는데 뭐하러 저런 영화를 내 돈 주고 볼까. "본 적도 없으면서 입 다물라"는 소리는 받지 않는다. 애초에 보고 싶게끔 만드는 것은 영화감독의 역량이고, 노이즈 마케팅도 그 중 하나지만, 그렇게 해서 입소문을 모으고 영화를 보러 오는 사람을 모아 봐야 그게 전부다. 옛날에 들은 이야기를 여기 마지막으로 써 둔다.
매번 출판사에 작품을 투고하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의 글은 재미있지도 않았고 무언가 유익한 내용도 아니었다.
자신의 원고가 번번이 퇴짜를 맞자 분노한 여자는 그 출판사 편집장에게 항의 편지를 썼다.
"당신들이 내 글을 읽는지 확인하려고 원고지 가운데 몇 장을 풀로 붙여 놨는데,
반송된 원고를 보니 붙인 자리가 그대로 붙어 있네요.
어떻게 당신들은 내가 쓴 글을 제대로 읽지도 않고 퇴짜만 놓죠?"
편집장은 여자에게 답장했다.
"저는 달걀을 한 입 먹어 봐서 그 달걀이 상했으면 끝까지 다 먹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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