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부정하지 않고 신뢰한다'는 것이 꼭 백제라는 왕조가 고구려에서 내려온 추모왕의 아들 비류와 온조라는 형제의 남하로부터 시작된다는 기록을 그대로 믿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삼국사기에는 '형제'라고 되어 있는 비류나 온조가 삼국사기 편찬 단계에서는 온조 따로, 비류 따로 이렇게 나뉘어 기록되고 있는 차원을 넘어서 아예 온조쪽 전승에서는 온조가 추모의 친아들이라고 하더니만 비류쪽 전승에서는 비류나 온조 모두 해부루왕의 서손 우태의 아들이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 어머니 소서노가 추모에게 재가하면서 그의 양아들로 입적되었다가 유류가 내려온 것을 계기로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왔다고 하는 등 기록이 갈린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해서 발해 문화에 나타나는 당나라나 말갈의 영향력을 부정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삼국사기에 비류, 온조 형제가 고구려에서 왔다고 해서 꼭 백제를 논함에 고구려 문화와의 연관성만을 강조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오히려 삼국사기는 “(부여의) 동명의 후손 가운데 구태라는 사람이 대방의 옛 땅에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것이 백제다”라는 북사나 수서의 기록을 인용해서 백제의 개창에 고구려보다 부여뿐 아니라 중국 대방군과의 연고 역시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삼국사기에서의 백제 개창 기사에 등장하는 고구려로부터 남하해 온 비류-온조 형제 시조에 대한 언급을 신뢰해서 백제 초기의 고구려계와의 연관성을 강조한다 하더라도, 그 형제가 남하했을 루트를 보면 어차피 그 길은 낙랑과 대방이라는 중국 군현이 존재하던 지금의 평안도, 황해도 지역을 거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남하하는 과정에서 기원전후 낙랑계 사람들과 접촉했고 이들 가운데 일부가 남하에 합류해 백제 개창에 참여했을 개연성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풍납토성에서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서차구와 노하심 같은 부여계의 유물들도 함께 발굴되어 초기 백제의 수립에 부여계가 관여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뒷받침한다. 심지어 이런 부여계 유물들은 한강 유역뿐 아니라 더 남쪽으로 충청도 청주에서도 확인되는 등 의외로 전파 범위도 넓었다. 한성백제 초기 지배층이 무조건 고구려계 일색이었다고 봐서 지리적으로 압록강 유역의 고구려보다 한강 유역과 훨씬 가까이 인접해 있는 낙랑이나 대방의 문화가 전혀 백제 문화에 유입되거나 백제 개창에 관여한 바가 없다고도, 초기 백제의 성립에 고구려계 문화의 영향력만을 강조해 부여나 낙랑, 대방의 영향력은 도외시해서 딱 잘라 제쳐놓을 수만도 없다는 이야기다.
고구려 문화가 한강 유역에 등장한 게 3세기 중반이라고 해서 백제가 3세기에나 세워졌다고 볼 이유는 없다. 고구려도 그렇고 백제도 신라도 가야도 어느 날 단 한 사람과 그의 집단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뚝딱 세워졌다고 보는 것 역시도 삼국사기 기록을 부정한 식민사관을 극복하겠다는 이유로 그 반작용처럼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무조건적으로 맹신하는, 또 다른 형태의 극단일 뿐이다. 비류나 온조의 실재나 그 관련 기록을 부정하지 않아도 후대에 비류나 온조의 후손들이 백제의 왕통을 잇게 되어서 그들의 조상을 중심으로 백제 초기 역사를 획일화시켜 기록한 결과물이 현재 전해지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이며, 실상은 비류나 온조 형제 두 사람만으로 단순화시켜 볼 수 없는 보다 복잡다단한 과정을 거쳐서 백제가 개창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인 역사 해석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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