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타노 다케시는 구로사와 아키라라는 영화감독의 영화에 '버릴 것이 없다'고 했다. 1초에 24프레임 찍히는 영화필름에서 두 시간 동안 넘어가는 17만 2,800컷 중에 아무 프레임이나 빼서 사진으로 현상해도 그 자체로 훌륭한 사진이 된다나. 영화 촬영을 하다 보면 배우도 막 몰입을 하게 되고 스탭들도 자잘하게 편집중 실수 같은 것도 있고 그러다보니 소위 말하는 '굴욕샷'이 영화 장면 캡처 과정에서 으레 드러나곤 하는데 구로사와 감독은 그런 굴욕샷 따위 전혀 안 나오게 사전에 리허설을 철저하게 해놓고 찍었다는 얘기니까(배우가 앉은 위치가 10cm 어긋난다고 영화 촬영 중지하거나 흐린 날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을 찍기 위해 흐린 날까지 기다렸다는 건 전설일까 레전드일까), 은연중 기대하며 고른 영화였는데 보면서 아아, 저렇게 묵직하게, 배우들 움직임도 거의 없다시피 하게 찍는다면 가능할 지도, 하고 혼자서 납득해버렸다.
빠를 때는 바람처럼(其疾如風)
고요할 때는 숲처럼(其徐如山)
공격할 때는 맹렬한 불처럼(侵掠如火)
방어할 때는 굳건한 산처럼(不動如山)
예전부터 '카게무샤'라는 영화는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전개된다, 이러이러한 장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는 영화평론을 줏어들은 터라, 되도록이면 그 평론을 상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영화를 봤던 기억이 난다. Daum 영화 소개에 실린 이 캡처사진은 영화의 처음 시작 부분. 똑같은 얼굴을 한 세 사람이 앉아 있는데 누가 누구인지 분간이 안 된다. 아무래도 영화 감상하는 장이니까 이야기를 하자면 저기 다케다 집안의 문장이 그려진 바로 아래 앉아 있는 사람이 진짜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이고, 왼쪽에 앉은 것은 다케다 노부카도(武田信門)라고 신겐의 동생 되는 사람인데 오른쪽에 기가 질려 웅크려 있는 저 '카게무샤'를, 처형 직전에 사형장에서 빼내온 사람이자 '선임' 카게무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자세히 보면 왼쪽의 두 사람은 높은 곳에 앉았는데 오른쪽의 저 카게무샤만이 한 단 낮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랫동안 카게무샤를 해온 자신도 놀랐다고 한. "혹여 아버님이신 노부토라 공께서 흘린 씨가 아닐까 생각했다" 고까지 할 정도로(물론 카게무샤 본인은 가이에서는 멀리 떨어진 북쪽 오슈 태생이라고 하니 패쓰).
신겐과 외모가 몹시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신겐의 카게무샤로 간택된 남자의 처형 직전까지 갔던 죄는 푼돈을 훔친 죄라고 나온다. "나는 푼돈이나 훔쳤지만 너는 천하를 훔치려는 자가 아니냐!" 라며 외치는 그 남자에게 오히려 신겐은 기개가 대단한 것이 마음에 든다고, 이런 얘기를 또 해주시겠지. "내가 천하를 통일하지 않으면 피의 강과 시체의 산은 나날이 늘어갈 뿐 줄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를 추방하고 친아들을 죽인 내가 천하를 통일하려는 대의는 그것이다. 는 얘기인데 저러한 류의 자기 도취식 정의는 옛날 사람들에게는 흔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즘도 보면 그런 독선적인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실상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뿐이면서 다 누구를 위한 것이다, 뭐를 위한 것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인간들은 정말, 보면 구역질이 난다. 그렇게 혼자 십자가를 짊어지겠다며 설치는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독선으로 이어져 결국 자신을 망치고 있다는 것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얘기로 돌아가서 신겐은 평소 하던 대로 자신과 닮은 동생 노부카도를 카게무샤로서 전선에 보내놓고 자신은 가이의 영지에 머물러 있는데, 역사대로라면 그 전선이란 실제 역사에서 다케다 신겐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였다. 공략 중인 성의 숨겨진 물길을 찾았다는 보고와 함께 성에서 그 성의 성주가 밤마다 피리를 부는데 그 소리가 실로 미묘하다는 소식에 자신이 직접 가볼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날 총에 맞고 만다.
내 사족이지만 어쩐지 영화 속 신겐의 죽음은 백제의 성명왕이 관산성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죽을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보이기도 했다. 물론 554년 당시, 왕태자 여창에 의한 관산성 공략은 이미 끝난 뒤였고 피리 소리가 아니라 함락을 모두 끝낸 상황에서의 전후 처리 문제 때문에 휘하 측근만 거느리고 성으로 향하던 길에 운없게도(?)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서 죽고 말았지(물론 성명왕은 자신의 나라로 살아 돌아오지도 못했고).
'카게무샤'에서는 신겐이 총에 맞는 장면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한밤중에 피리 소리가 끊기고 총소리가 울려퍼지며 병사들이 놀라 일어나는 장면. 그리고 성 안에서 영주(누구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너구리 영감) 앞에서 자신이 어제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누굴 쏘아 맞혔습니다 하면서 성벽의 총안에 대고 총을 쏘는 장면을 재현하는 병사의 증언과, 성이 함락 직전인데 왜 퇴각하는지 모르겠다는 다케다군 병사의 의아한 물음. 그리고 다친 모습으로 가신들 앞에서 "내가 죽은 뒤에는 3년 동안은 나의 죽음을 숨기며 영지 보전에 힘쓰라"고 하는 신겐의 모습. 다케다 신겐이 총을 맞는 극적인 장면을 뭐랄까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색종이 조각 세 개로 사과의 그림을 그려낸다, 고 하는 표현 방식을 보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모자이크.
다만 극중 카게무샤(정확히는 같은 배우지만)가 처음 데려왔을 때만 해도 "가짜 역할도 가끔씩 해야지 온종일 하려면 병이 날 거요" 라면서 자신은 다른 사람 대역 따위 하기 싫다고, 진짜 신겐의 유해가 담긴 항아리를 깨고 뭔가 훔쳐가려고까지 시도하다 가신들에게 잡혀서도, "영주의 시신을 봤으니 더 하기 싫어졌다"던 그는 스와 호수에 수장되는 신겐의 비밀 장례를 훔쳐보던 오다-도쿠가와측 간자를 발견하더니만 갑자기 자신을 써달라고, 자신이 카게무샤를 하겠다고 나선다. 솔직히 뜬금없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다른 사람 역할을 하다 보면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고 싶어질 때가 있지. 그림자란 실체 없이 존재할 수 없어."
카게무샤(影武者)라는 단어를 일본어 사전에서 검색해 보면 두 가지의 뜻을 확인할 수 있다.
1. (적을 속이기 위하여 대장이나 주요 인물처럼) 가장해 놓은 무사(사람).
2. 배후 조종자; 막후 인물.(= 흑막黒幕)
첫 번째 뜻과 마찬가지로 일부러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고용한 그림자와 같은 무사. 하는 뜻 말고도 카게무샤라는 단어에는 '배후 조종자'라는 의미가 있다는 데서 살짝 머리가 돌아갔다.
영화의 '카게무샤'란 신겐만이 아니라 그 '카게무샤' 신겐을 내세운 가신 자체가 아닐까.
카게무샤를 내세우기 전에도 가신들의 진짜 신겐을 대하는 태도는 무턱대고 상명하복식은 아닌 듯. 동맹을 맺고 있던 아사쿠라 요시카게(朝倉義景)가 폭설 핑계를 대고 도망쳐 버렸다며 그 어이없음에 분노하는(실제 역사가 그랬다) 신겐에게 "올해 주군 나이가 몇 살인데 그리 투정을 부리십니까? 사람이라는 게 원래 지 이익 따라서 붙었다가 떠났다가 하는 줄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면서."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주군더러 '원숭이' 같다고까지 부르고 있다). 카게무샤를 들여놓은 동안, 가신들은 카게무샤에게 어디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 어디서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일일이 가르치는 와중에 은근히 자신들의 의지로 가이를 통치하고 있다. 가신들이 내세운 카게무샤는 신겐이라는 가면을 쓰고 신겐의 대역을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신겐이 살아있다는 전제하에 가신들이 신겐의 이름을 대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영지 내의 통치를 하기 위한 하나의 얼굴마담, 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만에 하나라도 카게무샤의 존재가 들키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영영 카게무샤가 신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가신들이 그 카게무샤를 내세워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가이의 정치를 좌지우지 할 수도 있었다. 카게무샤라는 존재 자체가 신겐의 유언이니까, 윗동네에서 유훈통치하듯이 가츠요리가 불만을 품더라도 신겐의 유언이다,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다, 라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신겐이라는 인물의 카리스마 대신 그 카리스마를 등에 업은 영주들끼리의 연합은 자연스레 다케다 집안, 가이를 지배하는 영주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전형적인 군약신강(君弱臣强)이다. 카게무샤의 입장은 또 어떤가. 자신은 신겐의 유언을 핑계삼아 신겐의 죽음을 가리기 위해 가신들이 내세운 존재. 가신들의 마음이 어긋나거나 신겐의 죽음이 공개되었을 때(그의 죽음을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별수 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는 가짜일 뿐이다. 신겐의 죽음을 모른 채 신겐의 영지를 공격해오는 오다-도쿠가와 세력에 맞서 방어를 해야 할지 공격을 해야 할지를 놓고 작전회의가 열리고, 바로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츠요리가 짐짓 "영주께 처결해달라 하자"면서 카게무샤에게 물었을 때도, "움직이지 마라. 산은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한 마디로 끝. 결과적으로는 가신들의 편을 들어준 셈이다. 극중에서는 '주군 같았다'고 되어 있지만 사실 본인에게도 오히려 유리한 것이었고.
정작 다케다 신겐의 아들로서 차기 영주를 이어받을 가츠요리에게 그것은 분명 위협이었을 것이다. 하긴 아버지가 영주였고 아버지가 죽으면 당연히 자신에게 상속되어야 하는 영지가 가신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면 그걸 방관할 수만은 없겠지.
"나는 아버님의 아들이 아니라 그냥 한 부하였어!" 라며 분노를 토하는 이 남자는 신겐 이후 가이에서 다케다 집안의 힘이 약해져 결국 멸문에까지 이르는 원인을 제공한 못난 영주로 역사에 남아있다. 영화에서도 이러한 인식은 마찬가지여서, 초반에 전장에 나와 지휘중인 카게무샤(실제로는 다케다 신겐의 동생 즉 삼촌인 노부카도) 앞에서 다들 영주님 영주님 하면서 진짜 신겐을 대하듯이 연기하고 있는데 그 앞에서 "아버님께 보고해야 하지 않느냐"며 눈치없게 삑사리를불협화음을 내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아 저 눈치없는 새끼가" 이러고 눈총이 확 가더라. 가신들이 그걸 몰라서 지금 이러고 있냐고.
나는 이 다케다 가츠요리(가장 왼쪽)도 숨겨진 '또 한 사람의 카게무샤'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작중 가츠요리는 매번 전투에서 아들(다케마루 즉 신겐의 손자)의 대리로서만 참전할 뿐이라며 투덜대는 부분이 있는데, 즉 가츠요리가 어떤 공을 세워도 그것은 자신의 아들이 세운 공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얘기다. 누구나 자신이 후사로 삼고자 하는 사람에게 시키는 '후계자 수업'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영화 속에서 신겐은 어린 손자 다케마루에게 훗날 가이의 영주 자리를 물려주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데(신겐, 그러니까 실제로는 카게무샤를 맡은 도둑이 퇴군해 가이로 돌아왔을 때 다케마루에게 하녀가 치는 대사 중에서 "도련님은 나중에 영지를 물려받으실 분이니까" 어쩌고 하는 대사도 있었던 것 같다), 그 말은 신겐이 예기치 못하게 총 맞거나 하는 사태 아니었다면 손자가 나이 차서 성인식(원복)하기를 기다려 손자에게 정식으로 영주(조금 어려운 말로 가독家督) 자리를 물려주고, 가츠요리는 손자의 후견인으로서 내세운다는 것이 신겐의 구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종에게 양위해 놓고 세종의 뒷배를 봐주었던 태종처럼. 다케마루가 노련한 가신들에게 휘돌리는 경우가 있다 해도 다케마루의 아버지로서(위계상으로 가신들보다는 높은) 가츠요리가 나섬으로서 가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 을 신겐은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감독의 의도인지는 모르겠는데 가츠요리의 어두움과 대비해 '밝음'을 강조시키기 위해서인지 애첩들도 어깨의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해 보고 뒤늦게야 알았던 카게무샤의 정체를 한 번 딱 보고 "할아버지가 아니야!"라며 알아본 게 다케마루였다). 영화 대사를 빌리자면 풍, 림, 화, 산의 산(山)과 같은 흔들리지 않는 굳건함.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가츠요리라는 남자는 작중 카게무샤가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고 쫓겨나기까지 하는 과정에서 딱히 뭔가 악수(惡手)를 두거나 한 것은 없다. 굳이 갖다붙이자면 마지막에 무리한 싸움을 밀어붙인 정도? 영화 안에서 가츠요리가 카게무샤라는,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가신들이 데려다 앉힌 듣도보도 못한 도적에게 아버님, 영주님 이렇게 부르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것, 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거다. 좀 지나쳐서 그렇지. 스와 호에 수장된 것은 아들을 지키려는 뜻이요, 풍림화산 깃발을 아들에게는 쓰지 못하게 한 것도 아들 가츠요리가 자신의 깃발로서 천하를 얻기를 바래서였다고 하는 가신의 달램에도 가츠요리는 그저 불만, 불만, 불만. 그 중에서도 큰 불만은 "가짜를 부모로 모시기 싫다!" 누가 여기에 함부로 토를 달 수 있을까?
그럼에도 다케다 가문의 멸망이 이 가츠요리 때문이라는 역사의 통설이나, 카게무샤가 쫓겨나고 나서 바로 나가시노 전투(다케다 집안을 몰락시킨 노부나가 총포대에 의한 다케다 기마대의 몰살) 장면으로 넘어가는 데서, 카게무샤가 쫓겨난 것에 측은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이 그 감정의 분노, 라는 전환을 거친 심리 이입을 가츠요리에게 자연스럽게 함으로서 카게무샤가 쫓겨난 것이 마치 가츠요리의 획책인양 보이게 하려는 것인가, 도 생각해보았다. 다소 낡은 방법이라고 하실 사람도 있지만 오늘날 한국의 뻔한 드라마에서 악역이 주인공을 괴롭히느라 일부러 되지도 않는 뻘짓하는 걸 보여주며 주인공을 괴롭히는 장면을 넣는 것에 비하면 훨씬 매끈하지 않은가, 라는 것이 내 감상이다. 물론 다케다 신겐에게 가츠요리라는 불초한 아들이 있었고 그 아들 때문에 다케다 집안이 몰락하고 말았다는 역사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면 조금 다르게 여길 수도 있겠지. 현대에는 다케다 가츠요리라는 인물이 그렇게까지 못난 인간은 아니었다는 것이 학계의 해석인 듯하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라는 인물은 어디에서 어떤 배우가 맡아 출현을 하든 그만의 독특한 카리스마가 있다. 우리 나라의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 안중근 장군의사가 그렇듯 어떤 배우가 나와서 굳이 이 사람은 누구다 라는 자막이나 작중 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아, 이 사람 노부나가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그리고 솔직히 좀 닮긴 했어). 영화에서도 오다 노부나가는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하면서도 특수한 아우라라고 해야 하나 전매특허와도 같은 과장되면서도 생동감이 철철 흘러 넘치는 모습으로, 흡사 이 '카게무샤'라는 영화의 제2의 등장인물, 페이크 주인공이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도 들고 마는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도 그랬다지만 영화에서도 노부나가는 자신이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적수인 신겐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신겐이 살아있다는 간자들의 보고에도 의심을 거둘 줄을 모른다. 총소리가 나고 퇴군했길래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 있었다, 신겐이 살아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봤다는 간자들의 보고에 "신겐이 서둘러 돌아온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라면서, 적이 조금만 이상한 행동을 보여도 그 하나하나에 주목하고 무슨 일이 있는 건가에 의문을 품는 모습에서 오다 노부나가라는 인물의 치밀함, 내지 집요함을 느꼈다. 자신의 동맹(이라고 쓰고 부하라고 읽어야 할지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신겐의 영지를 공략하도록 시키면서 출정을 하는데 출정을 앞두고 예수회 선교사(실제로 노부나가 자신이 선교사와 가까웠다는)가 뭐라 자기들 말로 기도를 하는데다 팔을 척 들어보이면서 "아멘!" 하는 데서 움찔. 간결한 장면 속에 노부나가라는 인물의 카리스마가 모두 압축되어 표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카게무샤가 결국 쫓겨난 뒤, 신겐이 주변국에 3년 동안 자신의 죽음을 숨기라고 유언하며 자신과 닮은 카게무샤까지 데려다 썼다는 사실을 안 노부나가의 반응을 보여주는데 "이 노부나가를 3년씩이나 속이다니 역시 신겐은 대단해" 라는 자기 허세를 감춘 감탄까지.
인간사 50년이란
하천(下天)에 비한다면
덧없는 꿈과도 같은 것
한 번 태어난 몸인데
죽지 않을 자 누가 있으랴
자신의 깃발을 세우지 못한 채 아버지 신겐의 그림자와도 같은 '풍림화산' 깃발에 의지해 전투에 나섰던 다케다 가츠요리는 결국 패배했다. 패배 정도가 아니었지 그건. 풍림화산은 평소 다케다 신겐의 전투 방식을 보여주는 다케다 군단의 캐치 플레이즈, 신겐 자신이기도 했다.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기마대와 숲처럼 고요하게 진격하는 보병대가 불과 같이 맹렬히 공격하면 주군은 그 병사들을 믿고 산처럼 굳건하게 그들의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생전의 신겐의 모습이 풍림화산이라는 단어 속에 압축된 채 나타나 있었고 그 깃발에 담긴 의미는 신겐이 사라진 뒤 신겐의 카게무샤가 존재할 때만 하더라도 건재했건만, 웃기게도 신겐의 친아들 가츠요리에 의해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풍림화산이라는 글자를 떠올릴 때마다 사람들이 연상시키던 '무적 다케다'의 이미지는 신겐의 환영과 함께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작중, 다케다 가츠요리가 가신들의 반대에도 전투를 강행하면서 신라사부로(新羅三郞)의 가호가 어쩌고 하는 부분이 나온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라사부로, 즉 '신라'라는 단어에 집중해서 다케다 집안이 신라와 관련이 있는 것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얘기가 퍼진 적도 있는데 다케다 집안은 원래 일본 황족의 분파로 알려진 미나모토 씨(源氏) 집안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신라와는 별 관계가 없다. 다케다 집안의 시조인 미나모토노 요시미츠(源義光)가 시가 현에 있는 온조지(園城寺)의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 즉 신라선신(新羅善神)을 모시는 사당에서 원복(성인식)을 행한 인연으로 신라사부로로도 불렸을 뿐이다. 요시미츠 이후 그의 갑옷은 대대로 다케다 집안에 전해졌는데, 그 갑옷을 '타테나시(盾無)' 말 그대로 다른 방패가 필요없을 정도로 튼튼하다는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겐지 일문에는 여덟 벌의 갑옷이 있어 이 갑옷을 '겐지 8령(領)'이라 불렀는데,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는 것은 이 '타테나시' 뿐)
집안의 선조인 요시미츠의 갑옷 앞에 한 맹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것이 다케다 집안의 규율이었다. 애초에 다케다 신겐은 가이의 동북쪽, 귀문(鬼門) 방향으로부터 들어오는 재액을 막기 위해 이 갑옷을 스가타 텐진사(菅田天神社)에 봉납했지만, 영화에서도 나오듯 그의 집안이 멸망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노부나가가 다케다 집안을 멸망시키던 그 날, 어느 가신이 이 갑옷을 향악사(向嶽寺)의 삼나무 밑에 파묻었고, 훗날 겐지 후손을 자처하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것을 다시 파내서 다시 원래 있던 곳에 봉납했다. 이후 도난을 당해 크게 부서졌던 것을 관정 4년(1792년)과 문정 10년(1826년)에 각각 수리했음을 표면의 묵서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일본의 국보이다. 이 다케다의 다테나시를 다시 살려낸 인물이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겐지도 아니면서 겐지를 자처해 마침내 막부를 열고 쇼군의 지위까지 오른 노인이다.
일본에서 무로마치 시대까지만 해도 이 '오오요로이'라고 불리는 갑옷의 디자인은 꽤 심플했던 것 같은데, 이게 센고쿠 시대에 이르면 갑옷이고 투구고 아주 있는 대로 높이를 키우지를 않나, 이마빡에 동전을 붙이지를 않나, 뿔에 깃털을 달지를 않나 아주 별별 짓거리를 다 해놨다. 저게 전쟁에서 본인의 위치를 돋보이게 하는 동시에 상대편 앞에서 기를 세우고 상대편을 기를 꺾어 놓기 위한 일종의 시각적 시위라고 하는데, 전장에서는 이게 제대로 위력을 발휘했던 모양이다. 강항의 간양록에 보면 저 기괴한 생김새와 문양을 붙인 갑옷으로 무장한 일본군이 동시에 달려드는 것을 본 조선군은 그야말로 안 그래도 긴장해 있던 판에 시각적 효과 때문에 겁에 질려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다고 전하고 있다.
소설 <칼의 노래>(2001)를 집필하신 김훈 선생은 본인의 수필집이자 기행문 <자전거 여행>에서 <카게무샤>를 본 감상을 수록하셨다. <자전거 여행>의 해당 글의 제목은 '충무공-그 한없는 단순성과 순결한 칼에 대하여'이며 그 무대는 1597년 음력 9월 16일, 양력으로는 10월 26일 이순신의 생애 가장 위대한 승리로 기억되는 명량 해전이 벌어졌던 진도 앞바다이다. 소설 칼의 노래도 마침 작중 이순신의 전투로 초반부에 명량 해전이 등장한다.
<자전거 여행>에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바라본 북한산과 경복궁, 그리고 그 앞으로 펼쳐진 육조거리는 이 한반도의 정치적, 이념적 '정통성'의 축선이며, 그 축선의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 광화문에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훈 선생은 일본문화 개방으로 카게무샤를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셨다고 했는데, 카게무샤가 일본문화 개방으로 한국에 개봉된 것이 1998년이었으니까 <칼의 노래>가 출판되기 3년 전의 일이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카게무샤>를 보고 나온 김훈 선생의 눈에 들어온 장식도 뭣도 없는 밋밋하고 칙칙한 갑옷을 입은 이순신의 모습은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 속의 그 화려한 색감에 요란한 장식들로 번쩍거리는 무장들의 갑옷과 한눈에 대비되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 '화려함'과 '단순함'의 대비가 김훈 선생이 <칼의 노래>라는 위대한 걸작을 집필하는데 어떤 식으로든 영감을 주었으리라. <칼의 노래>의 초반부는 옥을 나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지만 칠천량의 대패 이후 '함대도 병사도 없는' 이름뿐인 수군통제사로 복직한 이순신의 모습과, '허깨비'를 좇아 길삼봉이 누구인지를 찾느라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들이고 고문하고 죽여댔던 조선 조정과 열두 척의 배로 울돌목의 바다에서 '태산처럼 찍어누르는' 물살과 그 물살을 타고 밀려드는 헤아릴 수 없는 일본 수군을 맞아 싸웠던 명량의 전투로 이어진다. 전투 끝에 이순신은 무늬 있는 붉은 비단옷을 입고 도깨비를 새긴 투구를 쓰고 있던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건져다 목을 베어 돛대에 내걸었다.
<자전거 여행>에서 김훈 선생은 영화 <카게무샤> 속에서 카게무샤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권력 구조를 '허깨비'라고 불렀다. <칼의 노래> 속에서 선조와 조선 조정은 그 '허깨비'를 좇아 부질없는 옥사를 벌이고, 이순신을 구금했다가 풀어주고,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시킨 이순신에 대한 의심을 감추지 못한다. 초반부 이순신과 묘한 신경전을 벌였던 경상좌수사 배설은 자신이 칠천량 전투를 앞두고 빼낸 열두 척 배를 거의 고스란히 내버려둔 채 몰래 도망쳐 버렸고, 명량 해전 이후 내려온 금부도사는 이순신이 조정에는 배설이 도망쳤다고 해 놓고 실은 이순신이 배설을 몰래 숨겨두고 반란을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한다. 그 '허깨비' 같은 짓들은 결국 조선 조정으로서는 그들의 권력의 정당성을 위한 것이다. 권력의 속성이란 게 끊임없는 의심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 같은데, 그 의심의 실체가 끝간 데 없이 생겨나고 또 생겨난다는 점에서 어느 순간 의심은 합리성을 잃어버린 의심을 위한 의심으로, '허깨비'로 변해 있다. "길삼봉이 누구냐"는 물음을 "누가 길삼봉이냐"는 물음으로 바꾸어 무고한 사람들을 마구 잡아들여 고문하고 죽였던 조선 임금과 그 조정처럼. 그 허깨비와 대조되는 '사실에 입각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는 존재'로서의 이순신이 <칼의 노래>에 등장하고 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화려한 갑옷들에 대해 백여 년에 걸친 센고쿠 시대, 피로 피를 씻는 치열한 전란 속에서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자신이 가진 호전성을 드러내기 위해 '패션'마저도 차츰 '무기화'시켜 갑옷도 투구도 더욱 요란하고 화려하게 변해갔던 것이라고 김훈 선생은 말한다. 그 센고쿠 시대를 통일하여 한데 집결시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휘하에 하나의 지휘체계로 집결한 일본 전체의 가공할 무력을 상대로 맞선 것은 저 일체의 수식도 뭣도 하나 없는 담담한 갑옷의 무인 이순신이었다는 것이 김훈 선생의 설명이다.
자신의 호전성을 적 앞에서 있는 대로 드러내며 상대를 도발하는, 그러니까 싸우고 싶다는 티를 팍팍 내며 덤벼, 덤벼 이렇게 상대의 기를 꺾어 놓고 자신을 보다 돋보이게 해서 무공에 대한 포상을 하나라도 더 받고자 애쓰는 휘황찬란한 일본 사무라이의 갑옷과는 달리 이순신의 갑옷은 싸워야 한다는 분노를 내면에서 최대한 통제하고 억누르며, 일본의 사무라이들처럼 최대한 전장에서 자신을 드러내어 무공에 대한 포상을 하나라도 더 받아내기 위한 그 어떠한 수식도 하나 없이 다만 적을 죽이기 위해서 죽지 않아야 하는 사람의 자기방어의 실용성으로만 가득하며, 그 담담함이 거대하고 압도적인 힘 앞에 버티고 선 이순신의 영웅적 면모를 더욱 부각시키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다. 이순신에게 울돌목 전투는 그 담담함으로 거대하고 압도적인 힘 앞에 버티고 섰던 전투였다. 그리고 전투에서 전사하는 것은 무장에게는 자연사라 말하며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였던 노량의 바다에서 총상을 입은 채 죽음을 맞는다. 애초에 전쟁 이후의 권력 재편 속에 이순신이 자리할 곳은 없었다고, 그의 죽음은 전사를 가장한 자살이라고 김훈 선생은 평하고 있다.
김훈 선생은 <카게무샤>를 '슬픈 영화'라고 불렀다. 권력이라는 것이 원래 '허깨비'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 까딱 잘못해 '허깨비'를 좇기가 쉬운 것이 권력인지, 분명한 것은 제3자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허깨비인 것을 정작 당사자들은 허깨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이 자신이 빠진 종교를 사이비라고 생각하지 않듯이. 영화 <카게무샤>에서 신겐의 병사들은 비록 진짜 신겐이 아닐지언정 카게무샤가 진짜라고 상정하고, 또 진짜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으며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저버린다. 그리고 카게무샤가 신겐 본인이 아닌 카게무샤임이 드러나고 신겐이 사라진 뒤에도 마지막 전투를 앞두고 '지하에서 만나자'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신겐의 가신들은 장렬히 전사한다. 심지어 영화 초반부에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들어가려 했던 교토의 환영을 보면서 "저기에 교토가 있다. 내 깃발을 어서 세타 다리에 세워라"며 허우적대다 쓰러지는 신겐마저도, 마치 신겐은 이미 죽었는데도 신겐의 잔영과 떠내려가는 풍림화산의 깃발을 좇아 물에 뛰어들던 그 카게무샤처럼 허깨비를 좇던 존재였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허깨비일 뿐인 것들인데(물론 당사자 앞에서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그것을 자신의 목숨이나 그보다 더한 가치로 여기고 애지중지 여기는 이들의 사이에는 결국 서로를 이해할 여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존주의라는 것은 이런 것일 터이다. 당사자들은 진지한데 제3자가 되어 보고 있는 사람은 웃기거나 혹은 슬픈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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