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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일기

뒤늦은 4.19 의거 후기 - 어느 못난 수구초심(首丘初心)에 대하여

다음은 2014년 4월 14일자 세계일보(기사작성: 워싱턴특파원 박희준)에 보도된 내용.

 

 

1960년의 4 · 19 혁명 직후 故 이승만 前 대통령이 5월 11일 제임스 밴플리트(6 · 25 전쟁 참전영웅) 장군에게 보낸 편지.

"최근 한국에서 일어난 긴급사태 속에서 저를 생각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장군의 호의가 담긴 편지에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언젠가 내 행동이 진실하고 정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리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난 며칠 참담함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한 시민으로서 어렵게 얻어낸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보전하는 일에 힘을 보탤 생각입니다."

 편지를 보내고 꼭 18일 뒤인 5월 29일 이승만은 교민 최백렬 씨 주선으로 하와이로의 망명길에 올랐다. 2, 3주 잠시 다녀온다는 생각으로 애견 해피를 이웃에게 맡기고, 늦어도 한 달이면 돌아올 테니 집을 잘 봐달라고 하고는 이화장을 나섰다.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내외의 짐은 옷가방 두 개에 타자기와 마실 것, 약품 상자가 전부였고, 집조차 구하지 못해 지인 집에 얹혀 살며 궁핍한 생활을 이어갔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연금법이 없던 시절이라 교민들이 모아주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했는데, 밴플리트 장군은 6월 24일자 편지로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북쪽 호브사운드 별장으로 옮길 것을 제안했지만 8월 1일에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정중히 거절했다. 편지에 따르면 그때 이승만은 이미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였다.

 1961년 7월 25일, 한국을 방문하고 귀국하던 밴플리트 장군이 하와이에 들러 이승만 내외를 위로하고 돌아간 직후에 프란체스카 여사가 보낸 편지에서 "이 박사님(Dr. Rhee)은 지난 몇 주, 특히 지난주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누군가한테 절망적인 국내 상황(1961년 5월 16일, 한국에서는 박정희 등을 위시한 군부가 군사정변을 일으켰고, 이승만의 경호실장이던 곽영주 및 자유당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던 '정치깡패'들이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군부에 의해 일소되었다-필자주)을 전해들었다고 장군께 말씀드렸듯 박사님은 그 일로 며칠간 근심하면서 흥분했습니다. 안타깝게 저도 요새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최상이 아닙니다. …" 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 이승만 내외의 주소는 하와이 호놀룰루 마키키 가(街) 2033. 11월 16일자 편지에서는 "걷는 것이 불편해 항상 누군가가 곁을 지켜줘야" 한다며 이승만의 양자 이인수(조정래의 '태백산맥'을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에 국가보안법 위반 어쩌고 하면서 고발한 사람)를 이승만 옆에 두도록 해달라며 한국 가정의 전통까지 운운하고 있다.

 1961년 11월 22일,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미 일정을 따라 하와이에 온 한국 기자 3명에게 이승만은 "제발 한국에 데려가 주시오. 호랑이도 제 집에서 죽고 싶어합니다"라고 눈물로써 호소했다. 박정희 의장은 문병도 하지 않고 꽃다발만 보내는 것으로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마쳤다. 프란체스카 여사도 1962년 2월 5일 편지에서 "장군께서 정부 입장을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제는 환자를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호소합니다. 상황이 매우 긴급합니다. 부탁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절망적인 상황(desperate situation)입니다"라고, 2월 15일과 3월 1일에도 여러 차례 편지를 쓰고 도움을 부탁하는가 하면 3월 16일에는 귀국을 위한 이승만의 '사과성명'을 발표하고 3월 17일 날짜로 비행기표까지 끊어놓았다. 그 날 박정희 의장은 이승만의 입국을 거부했다.

 1962년 4월 6일, 동아일보 '횡설수설'란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기억도 쓰라린 4.19. 그 날도 앞으로 2주일이 남았다. 이 날을 계기로 해서 정부는 의로운 피의 제물이 된 186명의 희생자들에게 건국포장을 주게 됐다. 그 가운데 학생이 79명, 또 여자만도 15명이다. 더욱이 열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가 열한 명이라는 데는 뜨거운 눈물이 '횡설수설' 자의 붓 끝에 글자마다 방울방울 맺혀진다. 또 한편 원호대상자도 156명을 결정했다. 모두 4.19 의거 때의 부상자들이다. 구 정권 때까지만 해도 거의 버림을 받다시피 한 그들은 "누구를 위해서 독재자와 싸웠던가?" 할 정도로 냉대를 받아왔다. 그들 가운데엔 아직도 병상에서 신음하는 학생들이 더러 있다는 눈물겨운 실정이다. 그들 가운데 일부 학생은 일전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귀국한다는 소식을 듣고 단식까지 했다는 말이 들렸다. "4.19의 장본인 되는 그가 감불생심 돌아오다니" 하는 비분과 반항에서다. 그가 이러한 학생들의 분노가 타오르는 격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무조건 "가겠다, 돌아가게 해달라"는 독백만 되풀이하고 내려왔다....

 

 나이를 먹고 보면 사람들은 다들 어느 정도는 어렴풋이 알게 된다. 결국 크든 작든 인과의 법칙 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