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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일기

아라가미(荒神, 2003)

 누구나 그렇겠지만 영화든 소설이든 수준 높은 것을 보고 싶지 수준 낮은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 
 아무리 내가 재미있었고 내가 감동을 느꼈다 해도 다른 사람이 별로다, 라고 하면 그때 내가 느낀 재미나 감동마저도 가짜인 것처럼 느껴져 버리고 만다. 딴에는 괜찮다 싶어서 골랐고 재미있게 기분좋게 보고 나왔는데 나중에라도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가 무슨 트러블이 생겼네 어쩌네, 감독이 트러블이 생겼네 어쩌네 하는 소식을 들으면 그게 기분이 불쾌한 것처럼, 인터넷 게시판이나 오프에서 영화평이 안 좋게 된 걸 보면 이번에도 실패인가! 하고 울컥하는 기분이 들어 참을 수가 없다. 

 객관식 시험에 길들여진 한국인은 자신이 이거다 하고 탁 고른 것이 어떤 계기로 '틀렸다' 내지 '잘못되었다'는 단어로 귀결되는 순간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결벽증 같은 것은 아니다. 그냥 자기가 택한 답이니까 무조건 옳아야 한다는 옳지 않으면 참을 수 없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공포와 절망감으로까지 느껴지는 그 감정은 인간의 탐욕이자 이기심(자기가 선택한 건 무조건 옳아야 하니까), 내지 절박함(그렇지 않으면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없어지니까)이다. 
 바로 한 걸음만 뒤로 물러섰다가는 절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자리. 마치 시험을 칠 때와 같다고 할까. 

 시험에서는 오지선다형 객관식 답안의 하나를 무엇으로 찍느냐에 따라 자신의 향후 진로뿐 아니라 앞으로의 인생까지 결정된다고 하는 미신적인 믿음은 미신적인 믿음이 아니라 거의 현실 생활과도 직결되는 것이다(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현실 생활과 직결된다면 그걸 미신이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사회에 나와서는 자신이 줄타기할 라인을 누구로 정할 것인지를 또다시 진지하게 골라야 한다. 하나 아니면 답이 없다고 배워온 이상은 자신이 택한 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 옳다, 그르다 혹은 성공이다, 실패다 이 두 가지 잣대로밖에 정의를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어느 순간 자신이 택한 양자택일의 결과에 좌절해서 졸지에 자신의 존재 자체, 그것을 바라보던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까지 그 파급력은 지진에 갈라지는 땅의 파열처럼 뻗어오고 마는 것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밖에 세상을 볼 수 없는 인간은 얼마나 가엾은 인간인가. 그걸 깨닫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기타무라 류헤이 감독의 2003년작 영화 아라가미. 영화 자체는 케이블 방송에서 보여주는 걸 보게 됐지만. 기타무라 류헤이라는 감독의 이름은 나중에 곰플레이어 무료영화에서 「미드나잇 미트 트레인」(2008)을 보면서 엔딩 크레딧에 스쳐간 감독 이름과 똑같은 걸 보고 다시금 확인했지(미국 영환데 감독 이름이 일본 사람이니 눈에 띌 밖에).
 
 내용은 그저 그런데 영화, 싸우는 장면에서 보여주는 연출이 죽여준다고까지 할 정도로 멋지다. 특히 클라이막스 결투 부분은 와, 칼싸움을 저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구나 싶어서 멍하게 봤던 영화다. 
 
 비가 죽죽 내리는 어느 날, 깊은 밤, 두 사람의 무사가 깊은 상처를 입고 산을 헤매다 마침 산 깊숙한 곳에 있던 어느 암자로 찾아든다. 화살, 칼에 베인 상처까지 입은 몸으로 살아 남은 것은 한 사람. 목숨을 건지고, 식사도 대접받았을 뿐 아니라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밤중에 암자의 주인인 듯한 남자와 술까지 마시게 된 그 무사는 남자로부터 깊은 산에 산다는 덴구(天狗)의 전설과 함께, "은혜를 갚고 싶다면 나를 죽여달라" 는 납득이 가지 않는 요구를 받게 된다.

덴구. 
산을 지배하는 자.
그 귀는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들을 수 있고
그 눈은 천리 밖을 볼 수 있고
그 코는 인간과 짐승의 피 냄새를 구별할 수 있고
그 입은 오로지 산 것의 살점만을 먹는다.
허나 덴구란 이름은 사람이 갖다붙인 것.
원래의 이름은 아라가미.
분노의 화신이자 싸움의 신이다.
 
뜬금없이 덴구의 전설을 들려주는 그 수수께끼의 남자는 무사에게 묻는다. "말해 주게. 자네 지금까지 몇 명이나 베었나?"
 

"취미가 나쁘시네요. 벤 사람의 숫자 같은 거, 세는 거 아닙니다."

 
이제껏 느긋하면서도 유들유들하던 그 수수께끼의 남자가 안색이 바뀐 것은 이때였다. 
 

"아, 지금까지 몇 명이나 죽였는지 잊어버렸다?"
"자기 손으로 빼앗은 목숨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지금까지 벤 인간의 수는 794명이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지막 모습, 목소리, 마지막 표정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어."

 
 죽은 사람, 그것도 내 손으로 죽인 사람의 수를 센다는 것은 기괴해 보인다. 유영철도 아니고. 보통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지도 모른다. 살인이라는 행위가 법적으로 널리 허락된 시대가 아니니까. 지금은.

 일본에서는 무사가 길에서 사람을 베어 죽여도 그게 법적으로 처벌받지 않는 시대가 있었다. 바로 백년 전의 일이다. 살인(殺人)은 법률로서 보장되고 허용된 무사의 특권이자 기득권을 나타내주는 상징적 행동이었던 셈이다. 살인이 사회 지도층만의 고유 권한으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누군가 살인죄로 처벌받는다면 그 처벌은 살인 자체, 생명의 존엄함이라는 가치를 무시한 부정한 행동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을 물어서가 아니라 무사라는 사회 지도층, 특권 계층에게만 허락된 그 신성불가침의 특권을 넘보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 감히, 높으신 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을 천한 것이"라는 심리일까.

 그건 그거고, 요즘은 어떤가. 사람을 대놓고 죽이지는 않는다. 그게 높으신 분의 특권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도 없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누군가가 죽는 일은 없지만, 하나의 경쟁에서 패했다면 그건 패한 쪽이 감당할 몫이며 어떻게 됐든 패한 자에게 우선책임이 있다. 어디까지나 정정당당하게 투명하게 겨루었다면 얘기지만. 신분이 존재했든 존재하지 않았든,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된 나이가 되었다. 왜 밥상에 소시지 반찬, 삼겹살이 안 올라오냐고 반찬투정하는 애들한테 돼지와 닭이 불쌍하지 않니, 살생은 나쁜 것이에요 하면서 불경이나 읽어줘봤자 애들은 더 떼쓰고 울기 일쑤다. 지들이 맛있다고 먹는 소시지 반찬, 바닷가 놀러가서 텐트 치고 구워 먹는 삼겹살, 운동회나 소풍 때 먹는 치킨, 이런 건 다 한때는 살아서 움직이던 생명이었고 지들 옷이나 연필에 찍힌 귀여운 캐릭터 그림으로 혹은 봉제인형으로 만들어져 나온 걸 어렸을 때 그네들은 좋아라 끌어안고 이름도 붙여주고 살았었다.

 동물까지 갈 것 있나. 인간은 혼자서 잘 컸다고 혼자 힘으로 자수성가했다고 자부하는 사람조차 어렸을 때부터 그들에게 들어간 돈이나 노력, 인적 물적 비용을 뒤져보면 그 양이 결코 만만치 않다. 세상에 100% 자수성가 하는 인간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내 머리로 깨닫는 데만 26년 걸렸다. 몸으로 깨달으려면 아마 죽을 때까지 못 깨달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당장 인터넷에 쳐봐도 요새 양육비가 얼마니 교육비가 얼마니 하는 신문기사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과자 하나를 사먹어도 그 돈은 누군가에게서 받은 것이고 그것을 준 누군가는 원래는 자신의 것이었던 그 돈을 손해본 셈이다. 누군가에게 다 손해를 입히고 또 뭔가를 빼앗고 하면서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루쉰의 소설 속에서 광인이 찾아 지키려 했던 '인간을 먹지 않은 아이'란 어디에도 없다.
 

"나 하나 만들기 위해 몇만 명이 죽었다고 생각한다." 
ㅡ「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 중
 

 살생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그 경쟁 속에서 자신에게 패하고 낙오된 자ㅡ내 칼로 베어 죽인 사람의 숫자뿐 아니라 그들 하나하나의 이름과 생김새를 모두 기억한다는 것은 내가 이만큼 베어 죽였지 않느냐고 자랑하기 위한 오만이 아니라 겸손, 내지는 깊이 철든 각오가 아닐까. 나도 언젠가는 그렇게 누군가의 손에 패해 넘어가는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으며 언제든 그렇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대담함(패기라면 패기이고 배짱이라면 배짱). 오히려 자신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스러진 사람이 있다는(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지각조차 없다는 것은 정말 문제다. 당사자에게. 자기가 쓰러지면 그걸로 끝, 이라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쓰러진다는 사실 자체에 두려움을 느끼고 나아가 자신만은 그럴 일이 없어야 할텐데, 없었으면 좋겠다 하는 진시황제 불로초 찾는 생각에 쉽게 빠져들어 결국 자신을 망치고 말 테니까 말이다.

 다시 얘기가 전개되기를, 어떻게 자신의 은인을 죽이느냐며 굳이 거절하는 무사를 남자는 슬슬 도발하고 나선다.

 "여기 네 친구와 같이 왔을 때만 해도 거의 다 죽어가던 너는 어떻게 지금 이렇게 살아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남자는 다시 옛날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수많은 갓난아이를 납치한 어떤 다이묘(大名)가 있었어.
 불로불사의 약을 만드는데 갓 태어난 아기가 효과가 있다고,
 병들고 늙은, 상처입은 몸에 아기가 최고의 양분이 된다고 믿었던 거지.
 그 다이묘는 그냥 미친 놈이었어. 그리고 남자는 덧붙였다.
 근데 그놈의 생각이 아주 터무니없었던 건 아니야.
 

 
칼부림. 
그것은 무사의 다 낡은 칼만 부러뜨리고 끝났다. 
 

진정하고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충격을 잠시 진정시킨 무사는 다시 그 수수께끼의 남자에게 따졌다.
 
 "어째서 나인 겁니까? 친구를 죽이고 날 고른 이유는 뭐죠?"
 수수께끼의 남자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너희는 둘 다 거의 죽어가고 있었어. 어느 쪽이든 죽을 거였지."
 "그러니까 왜 그녀석이 아니라 나였냐고!"
 "다른 이유 없어. 그냥 아무나 하나 골라잡은 거야. 그게 다야."
 

 '이유가 없다'는 것이 이유인 것처럼 난감하고 지랄맞은 상황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세상에는 뭐라 이유를 말할 수가 없는 상황들이 너무 많다. 처음부터 이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 이유를 갖다 붙이려는 사람이 오히려 머쓱해질 정도로 세상은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것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럼 뭐, 자네는 자기가 죽고 그 친구가 살았으면 좋았었다 이거냐?"

 아무 대답을 하지 못하는 무사에게 그 수수께끼의 남자는 말을 잇는다. 


 "잘 들어. 난 자네 친구를 죽인 게 아니야. 자네한테 살 수 있는 기회를 준 거라고.
 둘 다 죽게 그냥 내버려둘 수도 있었어. 하지만 지금 자네한테는 조금이라도 살 가능성이 있잖아.
 큰 차이 아닌가. 친구 대신 행운을 잡은 걸 감사하라고. 그 가능성에 걸어보란 말일세."
  
 목적어와 술어가 미묘하게 뒤집혀 있다. 네 친구를 죽인 게 아니라 너에게 살 기회를 준 것이다. 라는 것은 뒤집어 보면 내가 살 수 있는 기회란 네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누군가 잠재적인 경쟁 상대가 될 인간)의 죽음에서 나온다고 하는 것. 그 쏟아지는 비를 뚫고 자신도 똑같이 초죽음이 될 정도의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자신을 여기까지 들쳐메고 온 자기 친구가 죽었는데 그 죽음에 대해서 마냥, 그때 내가 죽고 그 친구가 살았어야 옳았을까 라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한다.

 
 "가능성은 무슨. 그냥 살인자일 뿐이면서."
 "뭐 사람만 죽인 건 아니었지."
 

 수수께끼의 남자는 처음 무사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했을 때부터 몇 번이나 그렇게 말했다. "이 세상은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인간으로 보여도 인간이 아닌 자들이 세상에는 널렸다. 자신이 인간인 줄 알고 살았던 그 수수께끼의 남자 자신도 자신이 인간이라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인외(人外)의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예전부터 자신은 이상할 정도로 강해서 여기저기 싸움을 걸고 다녔지만 끝내 사람들이 나를 못 이기더라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새 내 이름이 천하에 유명해져 있더라. 무사는 코웃음을 치면서 그 유명해진 당신 이름이 뭔데, 라고 물었다. 그리고 남자는 대답했다. 미야모토 무사시. 

 

 무사는 이 부분에서 정말 미친 듯이 웃어제꼈다. 아무리 중2병에 쩐 사람이라고 해도 무사시는 너무하지 않냐고. 웃어제끼는 그 순간 무사가 느꼈을 감정이 정말 절절하게 와닿았다. 컨셉충도 이 정도면 어디 병원 가서 상담 받아 보라는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한참을 웃어제끼던 무사의 얼굴이 수수께끼의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이거 실화냐..."하고 조용히 중얼거린다. "어차피 한번 죽었던 목숨인데 뭐." 남자와의 이런 선문답 같은 장황한 대화나, 덴구니 아라가미니 하는 듣보잡 존재보다는 차라리 미야모토 무사시라는 현실적인 이름에 더 자극을 받았던지, 무사는 드디어 남자의 요구를 받아들인다. 
 

 부러진 칼 대신 새로운 무기를 고르라며 권하는 남자.
 

"아, 안돼 안돼. 그건 내 거야."
"아무 거나 고르라면서요?"
"...."(그냥 내놔)
"아유, 미안. 미안하네."

 
 아니 그게 왜 거기 들어가 있는 건데.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뿜었던 장면의 하나다. 무사 역을 맡은 그 배우가 코믹 영화도 자주 등장했던 배우인지라 코믹한 장면이 영화 안에서도 적잖이 등장한다.
 오랜 고민 끝에 남자가 고른 무기는 바로 죽은 친구의 칼. 
 

"당신이 아라가미라면, 나는 뭐지?"
"날 이기면 알게 된다."

 
 뒷부분 전개가 좀 뜬금없게 흘러가서 영화에 맥이 풀리듯 황당한 기분에 빠지지만, 영화 안에서의 영상 자체는 굉장히 흥미롭다. 내용이나 대사 처리보다는 차라리 영상 자체, 싸우는 장면에서의 연출에 더욱 주목하게 되는 영화다.
 물론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