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존이 가르친 것은 귀신이나 원령의 앙화 혹은 기복 같은 것이 아니라 인과(因果)이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존재하고, 결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로부터의 원인이 필요하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어떠한 결과는 그 원인의 발생으로부터 결정되어 있다는 것.
사람들은 생각보다 어떤 사건의 원인을 단순히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엄청난 사건을 보면 그 이전에 그 엄청난 사건의 원인도 그만큼 엄청났으리라고 생각하고,
사건의 시작을 짚어 올라가면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나는 무언가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것만큼이나 원인을 찾는 것 역시
귀찮고 복잡하고 또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인리히 법칙이라고,
어떤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스물 아홉 가지의 눈에 보이는 사건이 있었고
그 와중에 또 삼백 가지 되는 자잘한 사건들이 '예고'로서 벌어지곤 한다는 설명이 존재한다.
1:29:300 이것도 꼭 수치 그대로 29가지, 300가지의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건들의 원인이나 발생 이전의 징조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대체로 29가지, 대체로 300가지의 일이 벌어지더라 하는 것이고,
29가지 300가지보다 더 적은 '예고'를 거치고 큰 사건이 터지는 경우도 있다.
이 '큰 사건'이라고 하는 것도 꼭 대구 지하철이나 세월호 혹은 이태원 급의 대참사일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닌 사건이 나 자신에게는 엄청난 사건일 수도 있는 거니까.
사람들에게 그 29가지의 눈에 보이는 예고, 300가지의 자잘한 사건을 꼽으라고 하면 과연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사건들을 들 것인가? 그렇지는 않을 거다.
사람마다 저마다 가치관이 다르기도 하겠지만,
'어른의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눈에 빤히 보이는 원인도
아예 말을 못하고 말을 돌리거나 우물거리는 사람도 있으니까.
(석가모니 부처는 아무래도 본인이 한 나라의 태자였고 '정치'를 경험한 사람이었으니
그걸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 것이다)
사람의 세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자기 눈에 그렇게 보인다고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이건 이거다,
저건 저거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좋게 말하면 소신이 있는 것이고,
안 좋게 말하면 눈치가 없거나 판단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맞는 말'이라고 다 해도 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감상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본생담 가운데 어느 겁이 많은 토끼가 자기가 누워 있던 나무에서
열매 하나가 떨어지면서 낸 소리를 세상이 무너지는 소리라 지레짐작하고 도망치고
그걸 본 숲의 동물들이 저도 모르게 토끼를 따라 뛰어가다가,
숲의 왕 사자가 멈춰 세우게 해 놓고 "대체 어디서 하늘이 무너진다는 소리를 들었느냐"고
동물들을 일일이 탐문하고 다니다 최종적으로 그 겁 많은 토끼를 찾아냈고,
그 토끼가 말한 곳에 떨어져 있던 나무 열매를 보고 토끼가 이 소리에 겁을 먹었을 뿐임을 알아내고
동물들에게 전해 주어 소동은 마무리되었다는 이야기는 그나마 쉽게 끝낸 케이스에 속한다.
어떤 사건의 배후 내막, 거기에 작용한 힘과 힘의 대응 원리를 깊이, 세세하게 파고 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저런 사건 이전의 일들을 수집하지만 설마 그게 원인이었다고? 라고 생각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넘겨버리는 일도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게 원인이라고 생각은 들어도 말을 꺼내지 못하거나.
어떤 게 원인이라고 말을 하기 어렵거나 또 보고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사람일 수록
그러한 원인과 원인의 관계를 대충 '신의 탓' 내지 '마귀 사탄의 농간'이라고 퉁쳐 버리기 좋아한다.
원인을 찾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쉽게 자신이 처한 지금의 상황을 막연하게
신의 탓이라고 뭉뚱그려 버리는 것이 차라리 더 쉽고 편하다는 것이다.
그게 아무래도 사는 데는 더 편할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분명히 어느 순간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는 별 것 아니었던 것이
오늘의 이 엄청난 사태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 하인리히 법칙의 설명이다.
우리가 겪는 사건들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이 개입하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우리의 사고 속에서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했던, 하지만 분명히 내 의지 내지 내 판단으로 스쳐갔던
수많은 결정들이 어느 순간에 나한테로 돌아온 것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러한 '원인'으로부터 파생되고 또 정해진 결과는 신이나 부처조차도 바꾸거나 소멸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신에게 빈다고 해서, 세존의 위없는 깨달음에 귀의한다고 해서 바뀌는 게 아니다.
늦출 수는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모라토리움은 무한한 것이 아니다.
입으로야 예방이 우선이다 예방이 최선이다 이야기할 수 있지만 세상에 별 것 아니겠지 하고
넘겨 버린 한 순간의 선택이 후에 엄청나게 커다란 눈덩이가 되어 돌아오는 것을 생각하면,
오늘 별 거 아니겠지 생각한 일이 언젠가 엄청난 사건이 되어 돌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다.
누구 말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걸 예방이라고 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런 걸 일일이 이거 이래도 되나 하고 일일이 고민하고 따져 보고 살 수는 없잖아.
완전 예방은 못해도 완화 내지 최소화 정도로 만족하고 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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