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amu.wiki/w/%EC%9C%84%EC%84%A0
예전 같았으면 이게 맞네 하고 넘겨 버렸을 텐데, 요즘은 뭐랄까, 그렇게 성장했다고 느끼지는 않지만 이런 글의 허술함이 엿보여서 그냥 지나갈 수가 없다. 딱 봐도 이런 식으로 나무위키 같은 데 와서 편집하는 인간들의 수준이라는 것이 엿보여서, 이들의 인간관이라는 것은 참으로 얄팍하고 단순한 것이구나 싶어서 웃음이 나온다. 나도 옛날에는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었지 하는 그런 거.
>(전략) 온유하심이 비길 데 없으니 예수라고만 하면, 사람들이 비둘기와 양을 연상한다. 이것이 예수의 일면인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다른 반면이 있으니 위선을 보실 때의 태도가 그것이다. 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팔고 사는 사람을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의 상과 비둘기 파는 사람의 교의를 둘러엎으시면서, 교통순사가 노방 상매를 정돈하듯이 난폭한 솜씨를 보이신 것은 너무도 유명한 사실이었지만(마태 21:12, 13), 그 밖에 서기관과 바리새교인들을 향하여 '화 있을 진저!'라는 저주를 속사포처럼 연발하신 것도(마태 23장) 전혀 외식하는 자, 곧 위선자를 대하여서다. 비둘기 같이 순하시고, 창기나 세리는 오히려 용납하시던 예수가 위선자를 대할 때만은 마치 동성의 자극이 반발하듯이 격퇴하지 않고는 마지 않으셨다. 가증한 것이 많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장 가증한 것, 아주 견딜 수 없이 가증한 것은 위선이었다. 따라서 성서를 읽는 자도 그리스도와 아울러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위선자인 줄 알게 되었다.
마는 위선자의 표본으로 지적받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언행을 상고하면 저들에게는 차라리 기특한 것이 많았다. 저들은 '말만 하고 행치 않는' 것이 결점이었으나(동 23, 3), 그 하는 말은 옳은 말이었으므로, 예수도 자기 제자에게 '바리새인의 명하는 말은 준행하라'고 가르치셨다(동 23, 2). 저희는 헛된 맹세로써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으나, 맹세란 것이 신성한 것인줄은 알았던 고로 지시할 물건을 고려하였다(동 23:16-22). 저희는 '잔과 소반의 거죽은 깨끗이 하되, 그 안은 토색함과 불의함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동23, 25)라고 책망받았으나 그래도 깨끗이 할 줄은 알았고 규모는 있는 사람들이었다. 저희는 선지자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의 비를 세움으로 책망받았으나(동 23, 29) 저희 스스로는 의인이 못 되면서라도 의인의 공적을 인식하는 안식만은 우리 조선 사람들보다 훨씬 나았다. 저희는 범사를 사람에게 보이려는 허영심으로 하였으나 그래도 선이라는 표준이 있는 백성이었다. 선을 행하지 못할 지라도 선을 행할 것이라는 도는 알았고, 이를 두려워할 줄은 알았었다.
돌이켜, 20세기의 문화를 자랑하는 현대인은 어떠한가? 현대인은 언행의 일치를 기하되 행실뿐 아니라 말까지도 선하지 않음을 귀히 여기며, 위선을 꺼려하는 고로 공연하게 불의를 말하고 비례를 행하면 도리어 솔직하고 철저하다는 사회의 찬탄을 받는 세상이다. 현대인은 도의의 기본을 파괴하고 선의 표준을 전복함으로써, 청천백일하에 불의를 감행하여, 위선의 필요성을 없이하였다. 오호라, 이제는 위선도 그리운 세대로다.
-김교신 '위선도 그리워'(1933년 9월)
일제 시대인 1933년에 이런 글을 쓸 정도였으니 이 시대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나 보다. 누구 말마따나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나는 그래도 언행이 일치된 삶을 산다'며 공공연하게 무례한 짓을 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김교신이 살던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도 있어서 김교신이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차라리 위선이 낫다고 글을 쓰게 한 것이다.
위선은 적을수록 좋으며, 따라서 위선에 대한 비판은 왕성하게 하는 게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나 타인의 위선을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기적 욕망 실현의 면죄부로 삼아선 안 된다. 트럼프는 성찰을 위한 극복의 대상이지, 모방을 위한 긍정의 대상이 아니다.
-강준만 칼럼 '위선을 위한 변명' 2017년 9월 24일 한겨레
철학, 내지 정치학에서는 위선을 마냥 그렇게 배제되어야 될 악덕으로 치부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리스에서는 악인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평생 선을 가장하고 살았다면 그것은 선한 사람이라고 보았고, 미국의 신학자이자 정치학자인 라인홀드 니부어는 "국가의 가장 현저한 도덕적 특징은 위선이다"라고 단언한다. 의도를 따지느냐, 행위를 따지느냐의 문제인데, 행위가 마음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우러난 것이 아니라 어떤 꿍꿍이에 의해서 연출된 것이라 해도 그 연출된 결과만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선한 행위와 다른 어떤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은 묻지 않는다. 행위에는 진짜, 가짜의 분별이 없다.
유교에서는 위선이라는 단어를 '향원(鄕原)'이라고 표현을 한다. 바깥으로 보이는 모습은 나무랄 데 없지만 드러내지 않는 속내가 따로 있는 사람. 하지만 그 행동은 영락없이 군자의 것이고 그 속내를 만천하에 드러내 보일 방법도 찾기 어려워서 어떻게 비난을 해야 할지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는 사람. 맹자는 이런 사람들을 굉장히 안 좋아했던 듯하다.
공리주의에서는 일반적으로 옳은 행위를 요구하는 규칙들이 제시되고, 선악의 판단은 그 행위와 그 행위가 낳은 결과를 대상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 윤리체계에 따른다면 선해지기 위해서는 '규칙'들을 지켜야 하고 그 결과는 '객관적'으로 관찰이 가능하다. 여기에서는 '하는 척'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타인의 평가를 바라는 마음으로 싫은 것을 감추고 억지로 행동했다 한들 그 사람이 보여준 '행동'이 윤리적 판단의 자료가 되는 것이지 그 마음을 문제삼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그 윤리체계 안의 선은 일부러 작정하고 꾸민다고 해서 성공할 성질의 것도 아니다. 공리주의는 어떤 목적을 증진하는 행위를 '선한 행위'로 간주하고 그 목적에 유용한 행위가 선이다. 이때 윤리적 판단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목적에 이바지하는 행위이다. 공리주의 체계에서 군자와 향원, 즉 선과 위선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군자가 향원과 달리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그 군자가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평가받을 때는 그가 선한 행위(즉 공공의 이익이라는 목적에 이바지하는 행위)를 실제로 보여주었을 때이고, 오직 '행동'만으로 판단하므로 그 마음에 따라서 달라질 향원과 군자, 위선자와 선인의 차이는 의미가 없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여왕 빅토리아의 부군이었던 앨버트 공은 평소의 행동이나 인품에 있어서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일찍 일어나고 일찍 일어나는 규칙적인 생활에 정부 한 명 두지 않고, 심지어 복도를 지나다 청소하는 하녀에게까지 "방해해서 미안합니다"라고 일일이 모자 벗고 예의를 차리는 그의 평소 모습을 당시 영국에서는 '차가운 샌님' 또는 '사이비 현학자'로 조롱하기 일쑤였다. 송대의 주자는 오대 시절의 풍도, 그리고 범질, 소자유(소식의 형) 등을 두고 향원 중의 향원이라며 "향원은 그 하는 행동이 선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칭찬하지만 끝없는 화가 있다는 것은 모른다"고 비난했는데, 풍도도 그렇고 소자유도 그렇고 지방관으로서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힘쓴 행적만큼은 비난하기 어렵다.
'기레기'와 마찬가지로 위선이라는 용어도 남발, 악용되기 쉬운 단어라는 생각이다. '언행일치'를 말하면서도 행동은 물론 말까지도 뻔뻔스럽게 과장, 거짓으로 부풀리고 치장해 놓고 그걸 '솔직' 내지 '용감함'으로 포장하는 사람들이 으레 자신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위선 떨지 말라는 소리를 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실제로도 위선은 사실상 누군가를 속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는 곧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만약 위선을 한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을 때 위선을 당한 사람에게는 배신감과 상처를 받기 때문에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이다.
나무위키에서는 "악한 의도를 가리기 위해 고의적으로 선을 이용하는 것"을 위선이라고 한다고 했다. '악한 의도'라는 말을 하기 전에 사람의 본성은 선인가, 악인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본성이 악이라면 '악한 의도'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악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애초에 선한 의도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없으니까. 악행을 저질러 놓고 '대의를 위해서' 혹은 '더 큰 선을 위해서' 이런 식으로 둘러대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동서고금의 '독재자'라 불리는 이들이 모두 그런 식이었고, 사람을 가스라이팅해서 제 이익 챙기는 인간들도 그런 식이었다.
문제는 '악한 의도를 가리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선을 이용하는' 일체를 위선으로 부르고 부정하려 한 나머지, 그러한 선으로 분류될 만한 행동 전체에 대한 평가를 '위선'으로 낙인찍는 짓거리, 아울러 사람 앞에서 갖추는 표면적인 인상들(보통은 '사회성'이라고 부르는) 자체를 위선이고 가식이라고 냉소하는 이들이다. 위선보다는 대놓고 악한 것이 낫다, 나는 가식 떠는 거 싫다, 싫은 것을 싫다고 말도 못 하냐, 혐오할 자유도 없냐 이렇게 떠드는 인간들이 오히려 멋지다, 솔직하다, 사이다다 이런 식으로 칭송을 받는 경우를 여럿 본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굳이 비난하고 싶지 않다. 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공자의 이야기를 빌리면 길모퉁이에 숨어서 볼일 보는 사람이 아니라 대로변에서 볼일 보는 사람.
속에서는 오만 더러운 감정이 일어도 일단 체면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뒷감당도 생각해야 하니까 등등의 이유로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 것과, 악행을 저질러 놓고 어떻게든 아닌 척 덮으려고 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 문제다. 강준만도 지적한 것이지만 세상에 위선 없는 인간과 위선 없는 사회는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고, 사람은 결국 어느 정도는 가면을 쓰고 살 수밖에 없다. 나한테 욕 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걸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찍어누르면서 분노하지 않은 척 평온하게 사람을 대하는 것도 엄연하게는 위선일 것이다. '악한 의도를 가리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선을 이용하는 것'이니까. 내 면전에서 나를 두고 기분 나쁜 소리를 하고 나를 있는 대로 짓밟고 깎아내리면서 대놓고 무시하는 인간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최대한 표정관리하면서 속에서 진짜 칼 들고 확 죽여 버리고 싶은 걸 찍어 누르려고 어제 봤던 재미있는 소설, 만화 이야기나 반려견 하나 키울까 집에 가면 나 반겨줄 귀여운 반려견 하나 이런 걸 생각하는 나는 '위선'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위선'을 지속하는 한, 즉 그 마음이 어떻든 '선한 행위'를 지속하는 한 그는 윤리적인 사람이다. 애초에 인간이 자기밖에 모르고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는 추악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한들, 그렇다고 윤리적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욕망에 사로잡혔을 망정 그것을 감추고 사회의 공인된 가치를 지키려는 행위가 위선이다. 맹자가 위선자라 부른 향원은 이기심을 가지고 태어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고 그러한 자연적 여건 속에서도 공공선을 실천해 나가는 '노력가'라고 할 수 있다. 공리주의나 순자의 윤리설은 인간이 이기심을 갖고 있으면서 그 이기심에 굴복하지 않고 그 이기심의 유혹 속에서 공공선을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기심과의 갈등에서 이기심을 이기고 택하는 선한 행동은 순자나 공리주의의 입장에서는 더욱 칭찬받을 만한 행위이다.
사회생활하면서 내가 얻은 가장 중요한 깨달음이 뭐냐면 내 감정을 폭발시켜 드러내 봐야 결국 돌아오는 것은 비웃음밖에 없다는 것, 감정은 되도록 숨기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화가 속으로 치미는 상황인데도 일단 식 웃고 보는 성격이 된 것만큼은 내가 나이를 그저 뒷구멍으로만 먹지는 않았구나 하는 자기 위안이 되어 주고 있다. 위선을 문자 그대로 '선한 척 가장하는 행위' 일체로 정의해서 '본심은 그렇지 않으면서 겉으로는 그런 척 하는' 것 자체를 '위선'이라며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결코 현명하지도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 앞에서 자기 속내를 숨겼다는 것 자체를 위선으로 봐서는 곤란하다.
행동하는 위선은 선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은 아니다. 자기 만족이든 자신의 이득이라서 하는 행동이든, 누군가는 도움을 받게 된다면 악보다는 나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리고 본심이 어떠하든 '위선'이라는 행위 방식을 택하고 있는 한 그에게 무언가 개선을 요구할 타협의 여지가 있다. 그래서 공자도 풀숲에 숨어서 볼일 보는 사람을 나무라고 길거리에서 볼일 보는 사람을 내버려 둔 것이리라. 애초에 개선의 여지가 없으니까.
심지어 도덕이네 뭐네 그런 걸 챙기는 것도 결국 자기 이익 위해서 아니냐고 냉소한다면, 어떤 대책도 없이 그저 막연하고 천진하게 믿은 사람이 잘못 아니냐는 냉소도 충분히 가능하다. 사람 일은 결코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공자는 "온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의심해 봐야 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비난하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되돌아 봐야 한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석가여래도 "사람들이 다 옳다고, 예전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라고, 내 스승이 하는 말이라고 다 믿고 받아 들이지 말고 내 스스로 탐구해서 그것이 맞는지 틀린지 확인한 뒤에 받아 들이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을 믿고 있었는데 배신이나 당했다며 호소하는 사람은 말 좀 험하게 보태면 순전히 그 사람을 믿으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나 세상살이 못하는 얼간이'라고 광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위선을 한 사람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었을 때 위선을 당한 사람에게는 배신감과 상처를 받기 때문에" 위선을 싫어한다는 말이 참 우스운 이유이다.
클리앙에 보니까 이런 댓글이 있더라. 나한테 존나 착했던 애가 수틀린 후로 ㅆ새끼가 되고 다른 사람한테 가서 나한테 했던 짓거리 반복하고 있으면 "존나 위선자네" 소리 나오는데 이럴 때 차라리 악이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느냐는 누군가의 말에 어떤 사람이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착한 놈이 수틀려서 개새끼가 되면 그건 내가 그 착한 놈도 못 참을 만큼 개새끼였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지."
괜히 드라마 검블유에서 민홍주 대표가 "나도 누군가에게 개새끼였을 수 있다"는 대사가 있는 게 아니다 싶었다.
참고 자료
이혜경(2011) <향원을 향한 유가윤리의 비판은 정당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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