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에 보면 공자가 자로에게 자신의 사람됨에 대해서 '무언가에 의욕이 생기면 먹는 것도 잊고 도를 즐기느라 근심을 잊어 늙음이 곧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한다'고 언급한다(술이18). 초나라 섭공이 자로에게 당신 선생님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자로가 대답을 잘 못했다고 공자가 듣고 이렇게 일러준 말이다. 논어에서 이걸 처음 읽었을 때 사람이 그게 가능한가 싶기도 했다. 공자는 또 소라는 음악을 듣고 사흘 동안이나 고기 맛을 잊었다고 하는데, 나는 지금까지 아무리 멋진 음악을 들어도 '굉장하다' 이상의 감정은 느낄 망정 고기 맛을 못 잊을 정도는 아니었다. 새삼 드는 생각이지만, 보통 공부든 운동이든 단순히 그림 그리는 취미 생활이든 이 정도로 몰입하지 않고는 사람은 무언가 이루어낼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책상이 지저분해서 안 돼
의자가 불편해서 신경쓰인다
주변에 소음이 많아서 집중이 안 된다
이 나이를 먹고 하는 생각인데, 공부한다는 사람 중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 치고 그닥 이렇다 할 능력이나 성과를 보여준 사람은 많지 않았다는 기억이다. 사람을 일괄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고 하지만, 뛰어난 목수가 도구를 탓하지 않고 신빨 딸리는 선무당이나 장구 나무란다는 말은 확실히 근거가 있는 말이다. 나 역시 돌아 보면 그렇게 도구를 탓하는 목수였고 장구를 탓하는 선무당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는 기억이다. 그래서 저런 기사가 나오면 솔직히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나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아서 불쾌하면서도, 내가 나 스스로에게 유체이탈 화법처럼 나를 제3자화시켜놓고 너 저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막 닦달하게 된다.
학습권 운운하며 교내 청소노동자들에 대해 저 대학생들이 걸었던 민사소송은 결국 경찰로부터도 검찰로부터도 '혐의없음'으로 처리되었다. 나는 저 대학생들이 자신들이 걸었던 민사소송이 설마 승소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저렇게 소송을 제기한 것인지 하는 의문이 가장 먼저 든다. 저럴 줄 알고 그랬다면 차라리 소신이라고 (좋게 봐 주자면) 그렇게 넘기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고, 모르고 그랬다면 그러니까 자신들이 어느 정도라도 승소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건 소송이라면 나는 코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인생은 실전이라는 거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세상이 돌아가지는 않고, 내가 다 옳은 것도 아니고 존중이네 뭐네 하는 말이 아무 데나 통용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어쩌다 운 좋게 연세대학교에 입학해서 자기가 잘난 맛에 사는 찌질한 너드 정도로, 내 눈에는 저 대학생들이 비칠 뿐이다. 학습권이라는 말도 웃기기는 마찬가지다. 이국종 교수의 골든 아워였나 거기에도 '학습권'이라는 말이 나오더라. 외상 환자를 이송하는 닥터헬기의 소음 때문에 자기 공부를 할 수 없어 고 학교에 클레임을 걸었다는 이름 모를 학생이 의무라고 해서 무조건 강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 권리라는 것이 마냥 보장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중국의 고사에는 독서삼여(讀書三餘)라고 해서, 후한대 동우라는 학자에게 배움을 청하러 찾아온 어떤 사람이 동우로부터 나 같은 사람 찾아다닐 시간에 너 스스로 혼자서 책을 읽어 보라는 말을 듣고 바빠서 그럴 시간이 없다고 했을 때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겨울은 한 해의 나머지, 밤은 하루의 나머지, 비는 때의 나머지이다." 농사철이 끝난 겨울에, 하루 일을 마친 밤에, 바깥에 나가기 어려운 비 오는 날에 여가를 내면 책 정도는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는 얼핏 생각하면 사람 사정도 모르고 하는 속 편한 '꼰대짓'으로 들리기 쉽지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동우 본인도 집안이 가난해서 일터에서 책 잡고 공부해서 황문시랑까지 오른 사람이다. 황문시랑은 요즘으로 말하면 차관급 관직이다.
물론 요즘처럼 복잡다단하고 하루 지나면 확 바뀌어 버리는 세상에서는 주경야독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물가도 높고 단순히 먹고 자고 하는 것에만 돈을 쓸 수도 없는 것이 요즘 세상이니까. 그런데 조선 왕조 5백 년 그 숭유억불 사조를 거치면서도 조선 시대 스님들은 사찰 유지하고 관리하고 다 했다. 왕실이나 대갓집의 막대한 시주는 고사하고 오히려 승려들이 국가에서 요구하는 온갖 물품들을 만들어 바쳐야 하고 개신교 신자들마냥 자기 말고는 전부 이단이라 떠드는 유생들에게 테러나 안 당하면 다행이던 시절에. 불경 유마경에는 광엄동자가 출가 수행자인 자신의 수행을 위한 '도량'의 조건을 찾아다니는 것을 보고 비야리국의 장자인 유마거사가 "뭐하러 굳이 '도량'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 다니느냐?"라며 도량 아닌 곳은 없다고, 심지어 불교에서 끊어버려야 할 대상이 되는 번뇌조차도 수행을 위한 도량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제번뇌시도량(諸煩惱是道場)이다. 수행자에게 있어서 번뇌가 있다면 그 번뇌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를 탐구하고 그 번뇌를 없애는 방법뿐만 아니라 번뇌 자체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궁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굳이 유마경까지 갈 필요도 없다. 석가모니 부처가 얻은 깨달음의 과정에서 왕궁에서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벗어난 혹독한 고행, 두 극단을 모두 체험해 보고서 석가모니는 왕궁에서의 호사스러운 생활은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또 다른 번뇌를 만들게 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내버리고 자신의 몸을 혹사시키는 혹독한 고행에만 몰두하는 것도 또 다른 번뇌를 만들 뿐 진정한 깨달음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석가모니 부처는 깨달음으로 다가섰던 것이다. 불교의 대명제는 결국 어떻게 하면 극단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사람은 공부든 운동이든 취미든 자기가 하기 나름이라는 거지.
나는 저들이 이번 일로 자신들이 무조건 다 맞다고, 자신들의 권리만 권리가 아니라고 머릿속에 새겨 넣었으면 좋겠다. 자신들이 그렇게 학습권 운운할 정도의 능력이 있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는지. 자신의 권리는 자기가 지켜야 한다는 말은 저렇게 자신보다 약한 사람들, 입지가 불리한 사람들의 권리를 부정하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으면 좋겠다. 도서관에서만 공부해야 할 이유도 없고, 카페에서 해야 공부가 잘 된다는 사람들은 아마 10년 뒤에도 똑같이 카페에서 그리고 도서관에서 죽치고 앉아 있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내가 그런 인간이었으니까. 그리고 나 역시도 그때의 나에게 똑같이 말하고 있다. "인생은 실전이야 좇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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