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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일기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

누구에게나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전제는 결국 모든 실패는 노력이 부족한 탓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더 노력하면 잘할 수 있다, 오늘 진 것은 노력이 부족했던 것뿐이다.' 아이들에게 계속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싹수가 노란 만화가 지망생의 귓가에다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는 잘될 거야"라고 속삭여주는 것과 같다. 이것은 애정도 뭣도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놈은 안 된다.
간단히 말해서 연예인을 지망하는 사람이 1,000명 있다고 치자. 그중 몇 명이나 연예 활동으로 먹고살 수 있게 될까? 고작 한 명 있을까 말까다. 나머지 999명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노력하면 꿈은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없다.
어째서 그렇게 무리하게 만드는가.
어느새 사람들은 무엇이든 노력 탓으로 돌림으로써 사람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차이가 있다는 현실을 외면하게 한다.
덕분에 요즘 아이들은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고, 꿈만 꾸고 있다 보면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갑자기 사회로 떠밀려 나오니까 혼란스러워 할 수밖에 없다.
자기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을 모두 남 탓으로 돌린다. 부모가 나쁘다고 방망이로 때리기도 하고, 사회가 나쁘다고 은둔형 외톨이가 되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신흥 종교에 빠지기도 한다.

기타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 노트>

 

 센고쿠 시대 일본에 모리 모토나리라는 다이묘가 있었다. 어린 시절 가신과 함께 이쓰쿠시마 신사에 가서 기도하고 나오는데 가신이 "나리께서 장차 이 주고쿠의 지배자가 되게 해 달라고 신께 빌었습니다."라고 말했더니 이랬단다. "천하를 달라고 해도 주고쿠를 얻을까 말까인데 넌 기껏 신한테 빌면서 고작 주고쿠를 달라고 빌었다고?" 모리 모토나리가 천하를 얻지는 못했지만, 그 타고난 모략으로 일본 주고쿠 지방만큼은 확실하게 그의 세력권이 되었다고는 한다. 조지 버나드 쇼는 아예 "다른 사람들이 오만하다고 부르지도 않는 정도의 자신감은 필요없다"라고 했다.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나는 흔히 노력은 재능을 극복할 수 있다고 떠드는 자기계발서류의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재능과 노력은 그저 벽을 두고 싸우는 경쟁관계가 아니며 천재가 길을 만들고 방법론을 개발해 노력파들에게 효율적인 노력법을 제시하고 노력파들은 그 천재를 지지하고 광고해 부와 명예를 약속하는 상호보완적인 일면도 있다. 혹자는 "애당초 뭔가를 도전할 때 천재들부터 의식하며 열등감 느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거나, 극소수의 상위 계층을 평균으로 잡고 그들만 인정하는 평균 올려치기 문화, 남 눈치보기, 비교의식, 과열된 경쟁 등등을 거론하며 이를 한국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 낸 안타까운 현상 중 하나라고 부정적으로 보면서 '스스로의 성장에 집중하며 타인에게 너무 비교의식을 가지지 말라'고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나는 뭐든 할 수 있다고 낙관만 해서도 안 되고, 스스로의 성장에 집중한다고 해서 타인과의 비교를 전혀 하지 않거나 자기 객관화에 소홀해서도 안 된다. 애초에 자본주의, 능력주의 사회에서 '경쟁'이 필요없다는 말은 존재할 수 없다. 평균 올려치기니 남 눈치보기니 비교 의식이니 하는 것도 지나친 과열화가 문제지, 자신의 지향점을 높이 잡고 다른 사람의 시각이나 반응을 수시로 체크하고 배제하지 않으며 남들에 비해 내가 빠지거나 부족한 점은 없는지 일일이 체크하는 것도 엄밀하게 말해 자기 계발을 위한 사전작업의 하나이고, 노력의 일부라고 본다. 

 

 소위 '재능과 노력'이라는 게 무 썰듯이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이것을 우리가 솔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화려하게 성공한 소수의 뒤에는 못지않게 노력했음에도 적절한 수준에서 머무는 다수와, 실패를 맛본 극소수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노력을 폄하하는 게 아니라 남의 위에 서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이야기다. 노력이라는 단어 자체로는 많은 것을 나타내주지 못하며 어떻게 노력하는지 어떤 방법으로 하는지 어떤 발상을 하는지 등을 말해주지 못한다. 오청원이 손가락이 굽을 정도로 바둑책을 열독하고 하늘을 바둑판삼아서 바둑 공부를 한 끝에 10번기의 금자탑을 쌓았다고 해서,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눈에는 단지 역경을 딛고 일궈낸 인간승리만 보일 뿐, 그 뒤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과 극소수의 실패는 보이지 않는다. 양극화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2010년대부터 비관적 신조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분노범죄와 묻지마 범죄의 증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수많은 경우가 있기에 몇몇 성공한 사례만 가지고 함부로 일반화하여 재단하기 어렵고, 화려하게 성공한 소수의 뒤에는 못지않게 노력했음에도 안타깝게 실패한 다수가 있다. 기타노 다케시는 이걸 '나 하나 만들기 위해서 몇만 명이 죽어나갔다고 생각한다'고 표현했다.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사람은 결코 같지 않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할지는 몰라도 인간 그 자체가 평등한 것은 아니다. 얼굴도 키도 머리도 100명이 있으면 100명 모두가 다르다. 백 명의 사람이 있으면 백명 모두 서로 다른 색깔이다. 외모, 성격, 기질, 신체 조건, 지능, 집안 배경, 성장 환경, 교육 등. 어느 것도 같을 수 없다. 인간은 규격화된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말콤 글레드웰의 1만 시간의 법칙 또한 입신출세한 사람들이 노력한 시간을 평균 잡아 보니까 "대략 1만 시간 정도 소요되더라" 라는 것이지, 1만 시간만 투자하면 누구나 그들처럼 성공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누구라도 열심히 하면 뭐든지 잘 된다는 건 동기부여를 위한 거짓말에 불과하고, 개별적인 사례를 가지고 마치 보편적인 법칙이라도 되는 양 확대 비약하는 귀납법적 오류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해 이런 말도 정신승리 혹은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노력하면 뭐든 이루어진다'고 자식을 위하는 척하면서 부모의 체면 차리는 말을 하지 말고,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다. 재능이 없는 아이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부모가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런 말 하면 아이가 위축되지 않느냐고? 위축되지만 않으면 운동신경 둔한 녀석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딸 수 있나? 
자기 자식이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음을 가르치는 것은 조금도 잔인한 일이 아니다. 그게 괴롭다면, 어떻게든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는 무기를 아이가 찾도록 도와줘라.
그걸 발견하지 못한다면, 적어도 아이가 세상에 나가 현실에 녹다운되어 상처를 입더라도 살아나갈 수 있도록 강인한 마음을 키워주는 수밖에 없다.

기타노 다케시 <기타노 다케시의 생각노트>에서

 

 혹자는 "이런 말을 하는 건 노력하려는 사람의 개선 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그런 쓴소리 들었다고 개선 의지가 꺾여서 노력이고 뭐고 포기해 버리는 사람은 애초에 개선 의지 자체가 가짜였고 노력을 운운할 자격조차 없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사람이 뭔가 해 보겠다는데 결과도 안 보고 안 된다고 초장부터 부정적으로 보는 짓거리는 당연히, 특히 육아에 있어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 틀림없겠지만, 뻔히 결과가 보이는데 그걸 좋은 말로 에둘러 말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더 잔인한 짓이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노력하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굳이 노력하면 될 수 있다고 '는'을 빼고 말한다. 그 미야모토 무사시도 "1천 일의 연습을 단(鍛)이라 하고, 1만 일의 연습을 련(鍊)이라 하니, 이와 같은 단련(鍛鍊)이 있고서야만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단련하면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고 했지 '승리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 천하무쌍의 검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