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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일기

목라근자와 목만치

25년 백제(구다라)의 직지왕(直支王)이 죽었다. 곧 아들 구이신(久爾辛)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목만치(木滿致)가 국정(國政)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스메라미코토(天皇)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백제기』(百濟記)에 이른다. “목만치는 목라근자(木羅斤資)가 신라(시라기)를 칠 때에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공(功)으로 임나(미마나)에서 전횡(專橫)하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귀국(貴國, 왜국)에 갔다가 돌아와 스메라미코토(天朝)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국정을 잡았는데, 권세의 높기가 세상을 덮을 정도였다. 그러나 스메라미코토(天朝)에서는 그의 횡포함을 듣고 그를 불러들였다.”

《일본서기》 권제10 오진 덴노 25년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가 아뢰니 장수왕이 기뻐하며 장차 백제를 정벌하려고 장수들에게 군사를 주었다. 근개루가 그 말을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어 이 지경이 되었다. 백성이 쇠잔하고 군사가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을지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해 힘써 싸우겠느냐.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에서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이로울 게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劦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목협과 조미는 모두 복성(複姓)인데, 『수서(隋書)』에서는 목협(木劦)을 두 개의 성이라고 하였다. 어느 쪽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삼국사기》 권제25 백제본기 개로왕

 

 목협만치는 《삼국사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21대 개로왕(455~475) 시기에 등장한 목협만치는 후대에 등장한 인물이다. 목협만치는 개로왕이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킬 때에 조미걸취와 함께 동행시킨 인물로 나와 있지만, 이후로는 관련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이 목협만치를 일본서기에 목라근자의 아들로 19대 구이신왕(420~427) 시기에 활동하며 백제의 국정을 쥐었다고 언급하는 목만치와 동일인물이 아닌가 하는 설이 있어 왔다. 

 

 이름의 유사성뿐 아니라 백제 조정의 중요한 인물인 동시에 시기적으로도 유사성이 있어 목만치를 목례만치와 동일인물로 보는 설이 존재해 왔지만, 노중국 등의 한국의 백제사 연구자들은 목협만치와 목만치를 동일인물로 보지 않았다. 목만치가 등장하는 《일본서기》 오진 덴노 25년은 《일본서기》 기록을 분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인 이주갑인상 즉 문면에 기록된 연대(294년)에서 120년을 더해야 실제 그 사건이 있었던 해와 같게 된다는(물론 전부 그런 건 아니고 대체로 그렇다는 거다) 법칙에 따라 414년에 있었던 일을 쓴 것이 되어야 하고, 《삼국사기》에 「목협만치」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 21년(475년)으로 양자간에 시대가 61년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 이유였다.

 

 더욱이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목만치의 아버지 목라근자가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백제가 왜군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할 때로써 《일본서기》에서는 백제가 왜군과 함께 가야 지역을 공략하기 전에 「(백제와 왜국의 군사들이) 함께 탁순에 모여, 신라를 쳐부수었다.」고 했는데 이때가 369년이고, 목만치는 《일본서기》에서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무렵 얻은 신라 여자에게서 태어났다는데 그럼 369년 언저리에 태어난 게 되므로, 목만치가 475년의 목협만치와 동일인물이라고 하면 양자 간의 시차가 100여 년이나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백제 대성팔족 중 하나인 목(木)씨는 목라(木羅), 목례(木刕), 목협(木劦) 등으로 나타나는 복성의 축약형에 해당한다고 보인다. 그리고 목라(木羅)와 목례(木刕)는 《일본서기》에서 똑같이 '모쿠라'라고 읽고 있다. 목협(木劦)의 경우 그냥 오자일 수도 있지만 《수서(隋書)《통전(通典)》 같은 중국 사서에서 굳이 언급한 것을 보면 마냥 오자라고 딱 잘라 버리기도 어렵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고려에 남아 있었던 (이도학에 따르면 아마 김대문의 《한산기》로 추정되는) 옛 기록을 따라서 목협을 복성으로 쓰면서도 이걸 수서나 통전에서 목씨와 협씨로 나누어 쓰고 있어서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에 대한 판단을 유보했다. 노중국은 《수서》 권81 백제전에 나오는 백제 대성팔족의 하나로 거론된 목씨(木氏)와 협씨(劦氏)는 후대에 와서 목협씨(목례씨)가 목씨와 협씨로 분지화(分枝化)한 결과로 해석하였다. 또한 ‘목협마나갑배(木刕不麻甲背)’(《일본서기》 권17 계체기(繼體紀) 10년(516) 5월조), ‘목협금돈(木刕今敦)’(《일본서기》 권19 흠명기(欽明紀) 13년(522) 5월조) 등 ‘목협(木刕)’를 성으로 하는 인물들이 많이 나오고 있어서 ‘협(劦)’과 ‘내(刕)’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고 ‘내(刕)’와 ‘라(羅)’는 발음이 서로 통하는 만큼 ‘목협’ · ‘목례’ · ‘목라’는 모두 동일 실체에 대한 다른 표기로 보는 견해를 일찍이 제시한 바 있다(盧重國, 1994, 「百濟의 貴族家門 硏究」, 『大丘史學』 48). 

 

49년 봄 3월 아라타노와케(荒田別)과 카가와케(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저(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沙白) · 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와 사사노궤(沙沙奴跪)에게【이 두 사람은 그 성(姓)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는 백제의 장군이다.】 정병(精兵)을 이끌고 사백 · 개로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발(比自㶱) · 남가라(南加羅) · 훼국(㖨國) · 안라(安羅) · 다라(多羅) · 탁순(卓淳) · 가라(加羅) 이렇게 7국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인 침미다례(忱彌多禮)를 박살내었다. 백제에게 주었다.

《일본서기》 권제9 신공 황후 49년

 

 이른바 백제의 가라 7국 평정 기사는 백제가 주도한 정벌을 마치 왜가 주도한 것처럼 주어를 바꿔서 기록했다는 천관우의 훌륭한 학설이 있으며, 이 기록 역시 앞에서 인용한 오진 덴노키와 마찬가지로 신공황후기 문면에 기록된 시점에서 120년을 뒤로 늦춰서 실제로는 서기 369년에 있었던 일로 보고 있다.

 

 목만치가 목협만치와 동일인물인가, 혹은 동명이인인가에 대해서는 목만치가 태어난 시점으로 《일본서기》에서 나오는(정확하게 말하면 《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기》에서)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라는 시점을 《일본서기》에 목라근자가 사사히코와 함께 '신라를 깨뜨린' 시점으로 등장하는 서기 369년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다른 군사 작전이었느냐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에는 목라근자가 신라를 쳤다고 하는 기록이 이밖에 달리 등장하는 기록이 없다. 

 

 목만치가 목례만치와 동일인물에서 목만치의 탄생 시점이라고 밝히고 있는 「신라를 칠 때」라는 시점을 굳이 369년으로만 고정시켜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우선 《삼국사기》가 근거가 된다. 목라근자가 활약한 369년 당시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인 기록은 《삼국사기》에는 일단 실려 있지 않고, 오히려 369년의 3년 전과 1년 전에 해당하는 366년과 368년에 백제와 신라 사이에 두 차례에 걸쳐 화친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와 신라 사이의 그 화친은 내물 이사금 18년(373년) 신라가 백제의 항의를 무릅써가며 백제 독산성주의 망명을 받아줄 때까지 유지되었다. 이후 백제와 신라가 다시 무력으로 맞붙게 되는 건 《삼국사기》 기록만 한정하면 17대 아신왕 12년(403년)의 일이다. 

 

18년(373) 백제 독산성(禿山城)의 성주가 300명을 거느리고 투항해 왔다. 왕이 그들을 받아들여 6부(部)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 백제의 왕이 서면으로 말하였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 쪽의 도망친 백성을 받아들임은 화친한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 이는 대왕의 바람이 아닐 것입니다. 부디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이에 대답하였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어 마음에 들면 오고 싫증나면 가버리니 실로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안하지 않음을 걱정하지 않고 과인을 나무람이 어찌 이리 지나치십니까?”

 백제는 그것을 듣고 더 말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권제3 신라본기제3 내물이사금 18년(373년)

 

 또한 《일본서기》에서 '신라를 쳤다'라는 말도 문면 그대로 신라를 공격했다는 말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당장 《일본서기》 안에서도 보인다. 369년 백제의 임나 원정을 ‘신라를 쳐부수었다’고 표현해 놓고 정작 눈에 띄는 군사 행동은 가라 7국 및 침미다례(해남이냐 강진이냐 또는 제주도냐 등의 설이 있지만 신라 방면은 일단 결코 아니다) 등지에서 이루어졌다는 점도 그렇고, 원래 《일본서기》에서 한반도에 대한 군사 행동은 대개 ‘신라를 쳤다’라고 표현되는 경우가 많아서 '신라를 쳤다'는 말을 말 그대로 '신라를 공격했다'라고만 해석할 이유도 없다. 후대의 일이지만 백제 부흥군 정부의 요청으로 왜국이 663년 2만 7천의 원병을 파병했을 때에도 이들은 ‘신라를 치게 했다’로 표현하고 있는데, 정작 이들이 백강에서 맞붙은 주력은 신라군이 아니라 당나라군이었다.


 또한 한문 특성상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 그 나라 여자를 얻어서 (목만치를) 낳았다」는 《일본서기》의 기술이 실제로는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한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일들을 마치 한꺼번에 일어난 일처럼 압축시켜 적은 기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장 《일본서기》에 실린 《백제기》 인용문이 원문을 그대로 실은 것인지 작성자가 임의로 축약해서 적은 것인지 무엇으로 보장하겠는가. 목만치가 태어났다고 주장되는 369년은 한창 가야 지역에 대한 군사행동이 이루어지던 와중이었다. 백제의 근초고왕이 바다 건너 왜국과 처음으로 수교하고, 임나 7국을 평정하고 마한의 잔당들을 정복하며 나아가 당시 전연의 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던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쳐서 고국원왕을 평양에서 전사시킨 것이 이로부터 4년 뒤의 일이다.

 

 김현구 선생의 말을 빌리면 굳이 전쟁하느라 한창 바쁜 시기에 만사 제쳐두고 부인부터 맞아들였다는 것도 그렇고 결혼하자마자 그렇게 빨리 임신하는 것도 아니고 속도 위반 그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에 대한 보장도 없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할 때 목라근자가 가야 평정이 끝나고도 한참 동안을 가야 지역에서 머무르다가 현지에서 부인을 맞아들였을 것이고, 이러한 혼인관계상 부인은 「현지처」로서 젊은 여자가 되기 십상이고, 거기서 태어난 아들인 목만치가 아버지 목라근자와 나이 차이가 거의 할아버지-손자 수준으로 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전혀 없다(김현구 《임나일본부설은 허구인가》 2010년, 창작과 비평사). 

 

목만치의 탄생과 고구려의 경자년 임나가라 원정


 물론 목만치가 태어난 것을 꼭 369년으로 못박을 필요가 없고 그 이후의 어느 시점이라는 반론을 따른다 하더라도, 그럼 정확하게 언제 목만치가 태어났느냐, 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말하기 어렵겠지만, 《삼국사기》 개로왕기에 등장하는 475년까지는 살아 있을 수 있을 정도의 나잇대에 걸맞출 수 있는 시점에 태어났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목만치의 탄생 시점을 계산함에 있어서 기준이 될 수 있는 인물이 구이신왕(재위 420~427)이다. 목만치의 탄생 시점을 369년 이후 언젠가로 내려잡는다고 할 때, 그 하한선이 《일본서기》 오진 덴노기의 414년, 《삼국사기》의 구이신왕의 즉위(420년) 이후로 넘어가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삼국사기》에서나 《일본서기》에서나 즉위했다, 죽었다, 식의 정말 짧은 기록밖에 남기지 않은 구이신왕은 목만치의 활동 시기나 그의 나이를 논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임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목만치가 백제에서 대신으로써 국왕을 능가하는 권세를 휘두르고, 왜국으로 건너가기에 이르는 계기가 구이신왕의 나이 어린 즉위에 있기 때문이다. 목만치가 백제 조정에서 국정을 쥐게 된 계기가 나이 어린 구이신왕의 즉위에 따라 그의 정치를 보좌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만큼 구이신왕의 즉위와 목만치의 대두는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있으며, 동시에 '왕모와 간통하며 무례를 행하였다'는 목만치의 존재뿐 아니라 목만치의 탄생 역시도 구이신왕의 즉위와 서로 인과관계가 성립되는 사건이라고 보아도 어색할 것이 없다. 상식적으로 왕모(대후)와 간통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그 왕모의 권위가 건재할 때에 가능한 것이고, 그 왕모의 권위라는 것도 선왕의 아내이자 현왕의 어머니라는 데에서 나오느니만큼, 그 왕모의 아들이 살아서 왕으로 재위해 있다는 전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목만치가 국정을 쥐게 된 계기를 (본의 아니게) 제공한 구이신왕이 즉위한 해는 《일본서기》에는 오진 덴노 25년(294)으로 되어 있고 이것이 실제 역사에서 이주갑인상(-120년)한 해로 실제 기년으로는 414년에 해당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고, 《삼국사기》에는 구이신왕이 420년에 즉위했다고 되어 있어서 6년 정도 차이가 난다. 전지왕의 사후에 구이신왕이 즉위했다고 한 것은 《삼국사기》도 《일본서기》도 공통되지만 어떤 사건에 대한 기년이 차이가 날 경우 《일본서기》보다는 《삼국사기》에 보다 무게를 두는 경우가 많다. 《일본서기》 초기 기록들이 웬만하면 다 이런 식이다. 《일본서기》에 고구려가 백제를 쳐서 한성을 함락시킨 475년 이전의 기록들은 대체로 기록된 기년에서 2주갑(120년)을 낮춰야 《삼국사기》 기년과 교차검증이 가능해지며, 그마저도 덴노의 권위를 높이려고 뭐든 덴노의 명령으로 그렇게 되었다 식으로 왜곡하는 경우가 《일본서기》에서는 일상다반사다. 그 이주갑인상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일본서기》 기년에 문제점이 많다는 점을 발견하고 이 기년상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일본 학자들이 이래저래 연구하면서 《일본서기》의 기년을 기록된 것에서 이주갑(120년) 밑으로 끌어내려 《삼국사기》 기년과 거의 비슷하게 되도록 조정해 얻은 결과로 나온 것이다. 이 경우 백제 조정에서 구이신왕의 즉위와 함께 이루어져야 할 목만치의 등장은 《삼국사기》를 따라 구이신왕의 즉위가 이루어졌던 420년의 일이고, 《일본서기》보다 6년 정도 늦춰져서 475년이라는 하한선에 더 가깝게 된다.

 앞에서 말한 대로 373년까지 백제와 신라 사이의 화친은 유지되고 있었고, 백제-신라 사이에 직접적인 군사 충돌이 있었던 403년 직전까지 목만치의 출생 시점은 내려가게 된다. 이것도 《삼국사기》의 기록만 가지고 말하면 403년이라는 거고, 이미 《일본서기》에서 언급된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라고 부를 만한 군사적 사건은 실제 역사에서 서기 400년에 한 번 거하게 있었다. 광개토대왕이 400년과 404년에 신라의 요청으로 5만이라는 대병력을 한반도 남부로 보낸 사건이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 ▨▨背急追, 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영락) 10년 경자(400년), 보병과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게 했다. 남거성(男居城)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도착하자 왜적이 퇴각하였고, ▨▨ 그 뒤를 급히 쫓아가 임나가라의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 항복하였다.

 

十四年甲辰 而倭不軌侵入帶方界. 和通殘兵, 石城連船▨▨. 王躬率▨, 從平穰▨▨鋒相遇. 王幢要截盪刺, 倭寇潰敗 斬殺無數.

14년 갑진(404년), 그럼에도 왜가 법도를 어기고 대방(帶方) 연안을 침입하였다. 잔병(백제군)과 연합하여 석성(石城)을 하고 배를 잇대어  왕이 몸소 군사를 이끌고 나가 평양을 거쳐 ▨▨에서 선봉이 서로 맞서게 되었다. 왕의 군대가 적의 길을 끊고 막아 좌우에서 공격하니 왜구가 궤멸되었고, 참살한 것이 무수히 많았다.

 

 광개토대왕릉비가 전하는 '임나가라 원정'이나 대방(지금 황해도) 연안에서의 해전 기사에는 백제가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학계에서는 이때의 왜병의 신라 공격을 백제가 배후에서 사주한 것이라는 데에 의견이 거의 공통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쟁에는 임나 즉 가야 연맹도 백제의 편에서 참전해 신라 공격에 일조했다.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가 언급한 '목라근자가 신라를 칠 때'라는 사건이 실제로는 369년이 아니라 400년의 유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임나가라 원정을 야기한 그 전투에서의 일이라고 할 때, 임나 방면 업무를 주관하던 백제측 무장인 목라근자가 개입할 여지도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369년에서 400년까지면 시간대도 30여 년 정도밖에 나지 않으며, 369년 시점에서 청년이었을 목라근자가 예순을 넘긴 노년이 된 400년을 전후해 만난 신라 여자에게서 목만치라는 아들을 얻었다고 설명해도 충분히 아귀가 들어맞는다는 이야기다.

 

 구이신왕의 재위기(420~427)에는 '어린 왕을 대신해 백제의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왕모(대후)와 간통하며 권세를 휘둘렀다'는 스캔들이 나올 만큼 어느 정도 사리분별을 할 만큼 목만치의 나이가 차 있었을 테고, 앞에서 추론한 대로 400년에서 403년 사이에 목만치가 태어났다고 하면 구이신왕 재위기에 목만치의 나이는 스물에서 스물세 살 정도인데, 한 나라의 국정을 맡기에는 (그 시대 기준에서) 너무 젊다고 할 나이도 아니고, 왕모(대후)의 내연남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을(...) 나이이긴 하다. 이 목만치가 475년의 목례만치와 동일인물로 이어진다고 할 때 구이신왕 재위기로부터 50여 년이 지난 475년 시점에서 목협만치, 즉 목만치는 거의 노년으로 아무리 낮게 잡아도 예순을 넘긴 나이다.

 

 예순, 일흔 나이에 활동한 사람이 이 시대에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목협만치 이후에 기록으로 확실하게 생몰년이 확인되는 백제의 인물로 국왕인 무령왕과 그 손자인 위덕왕이 각각 향년 61세와 향년 73세로 사망했다. 목만치 이전을 찾아 보면 온조왕의 어머니라 전하는 소서노(왕모)가 온조왕 13년(기원전 6년)에 61세(향년 60세)로 사망했다는 기록이 백제본기에 나온다. 백제 이외를 찾아보면 백제를 쳐서 한성을 박살낸 고구려의 장수왕도 시호 그대로 97세까지 살았고, 신라의 김유신은 78세로 사망했다. 고구려 고국천왕과 산상왕 형제의 왕후였던 왕후 우씨도 180년에 고국천왕과 혼인해서 234년에 사망할 때까지 54년을 왕비(+대후)로 지냈는데 이 당시 혼인 가능 연령(대체로 열네 살에서 열다섯 살)을 생각하면 예순에서 일흔은 거뜬히 넘긴다. 일흔 넘겨 사는 사람이 이 시대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시대상을 생각하면 목만치는 (《삼국사기》의 목례만치와 동일인물이라는 가정하에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는 상당히 고령의 나이에도 고구려의 침공 앞에서 왕자를 남쪽으로 도피시키는 막중한 업무를 수행한 것이 된다. 

 

구이신왕과 목만치, 그리고 팔수부인 사이


 또한 《일본서기》에는 구이신왕의 즉위 기사에 맞춰서 목만치가 왕모와 간통하고 국정 전반에서 권세를 휘두르다 덴노에게 소환되어 왜국으로 건너가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오진 덴노 14년(294년, 실제로는 414년)에 한꺼번에 벌어진 것마냥 몰려서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도 목만치의 탄생 기사와 마찬가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상당한 시차를 두고 벌어진 일들을 마치 한꺼번에 일어난 일처럼 압축시켜 적어 놓은 기록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본다. 목만치가 백제 조정에서 권력자로 대두하고 왜국으로 건너가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짧은 기간 동안 한꺼번에 벌어진 일이 아니란 얘기다.

 사실 기록이 없어서 그렇지 구이신왕은 420년부터 427까지 7년 동안 백제의 국왕으로 재위했다(목례만치가 모셨다는 문주왕도 2년밖에 재위하지 못하고 암살당한 것에 비하면 목만치라는 권신을 두고 7년 동안 재위했다는 것은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목만치의 백제 조정에서의 지위나 권세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단순히 팔수부인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데에만 의지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백제 조정에서 목만치의 위치를 가늠함에는 선대 근초고왕의 남방 원정을 도와 임나 지역에 백제 세력을 부식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공신(公臣)의 아들이라는 혈연과, 그 공신이었던 아버지가 임나에서 백제의 무장으로써 활약하며 마련하고 쌓아올린 인맥과 명성이 필수적으로 감안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서기》나 그에 인용된 《백제기》 모두 "목만치는 아버지의 공으로 임나에서 전횡하였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은 목라근자의 임나에서의 공적과 인맥, 명성이 목만치에게 그의 혈통과 함께 세습되었음을 암시한다. 어떤 권력을 부자 세습까지 해 낼 정도면 보통 견고한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런 정도의 권신(權臣)을 구이신왕이 자신의 재위 기간 중에 한 번이라도 함부로 내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별 능력도 없으면서 단지 왕모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권세를 휘두른다면 조용히 반대파를 모아서 숙청이라도 노려 볼 수 있겠지만, 목라근자 때부터 백제 조정을 섬기며 임나 관련 업무를 맡아 수행했고 그걸 세습까지 했을 정도면 마냥 목만치를 개인의 능력은 쥐뿔도 없이 운 좋게 좋은 집에 태어난 혈연이나 왕모와의 내연관계만 가지고 권세를 잡은 인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혈연도 엄연한 개인의 능력이자 실력으로 간주되었을 고대 사회에서야. 구이신왕 입장에서는 목만치 정도로 강력한 자체 기반을 가진 인물을 굳이 적으로 돌리기보다 자신의 편으로 잡아두는 것이 충분히 더 이익이라는 (설령 그것이 왕으로써의 자존심이나 왕권에 저촉된다는 중대한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그리 밑지는 장사는 아니라는 판단을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목만치는 억울한 피해자였을까

 

 《일본서기》나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기》 기사가 어떠한 긴 사건을 하나의 시점에 압축시켜 놓은 문장이라고 할 때, 목만치가 백제를 떠나서 왜국으로 간 것은 실제 《일본서기》의 기록과 달리 구이신왕의 만년, 늦으면 사망(427년) 이후의 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다. 나아가 팔수부인과의 간통 스캔들도 (구이신왕의 재위기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기록된 시점보다 후대의 일일 가능성은 물론, 목만치가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해 국정을 휘두른 것과 목만치가 왕모 팔수부인과 내연관계였다는 것 사이에 어떤 인과성이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니까 목만치가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해 백제의 국정을 쥐게 된 사실이 왕모 팔수부인과 내연관계였다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별개의 사건일 수 있다는 얘기다.

 

 국사를 배우게 되면 역사에는 '사실'로써의 역사와 '기록'으로써의 역사가 있다는 것, 선사 시대와 역사 시대의 차이는 그것이 '기록'되었느냐 혹은 기록되기 전이냐의 차이에 따라 구분된다는 것은 중학교 국사 시간 가장 첫머리에서 배운다. 모든 사실이 기록되어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기록은 말 그대로 기록이지 실제 사실 그대로를 모두 반영하지도 않으며, 기록에 나온다고 모두 사실 그대로인 것도 아니다. "목만치가 어린 구이신왕을 대신해 국정을 쥐고 휘두르며 왕모 팔수부인과 간통해 권세가 강했다"는 기록도 정말 왕모 팔수부인과 목만치가 내연관계에 있어서 어린 왕을 대신해 국정을 휘두르게 된 것인지, 아니면

 

 1) 목만치 본인이 국정을 휘두르다 보니 왕모와 간통했다는 소문이 나게 된 것인지(헛소문 내지 가짜 뉴스),

 2) 구이신왕을 보좌해 국정을 맡던 목만치가 차츰 자신의 권력에 취해서 왕모와 간통하는 짓까지 벌일 정도로 타락해 버린 것인지(인과 관계 전복)

 

하는 여부도 지금 남아 있는 기록 그 자체만으로는 단언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장 《일본서기》 본문에서는 목만치가 왕모와 간통했다고 언급하면서도 그 《일본서기》가 주석에서 인용한 《백제기》 기사에는 "권세가 당대에 강하였다. 천조가 그 포악함을 듣고 불러들였다"고만 언급하지, 왕모와 간통했다는 언급은 빠져 있다. 물론 이것도 축약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목협만치의 실각은 언제인가

 

 목협만치가 목만치 본인일 경우 목만치는 일단 구이신왕 사후이든 언제이든 백제를 떠나서 왜국으로 갔고 475년 시점에서 다시금 백제의 왕자 문주를 도피시키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우리나라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신편 한국사에는 웅진 천도 이후 백제 내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왕권의 귀족 통제력이 느슨해져 공적인 권력 체제 대신 물리적인 지배 수단인 병권, 즉 군사력을 장악한 실세귀족이 병관좌평직을 통해 정치 권력을 차지하였고, 배타적인 권력 독점을 위해 방해되는 세력들을(심지어 국왕조차도) 제거했다고 설명되어 있다. 문주왕을 시해한 것은 《삼국사기》에 따르면 기존의 부여계 해씨 귀족인 해구(解仇)이다. 이 해구와 같은 실세 귀족들에게 밀려서 목협만치가 백제를 떠나야 했다는 것이 신편 한국사의 설명이다. 

 

 문주의 남쪽으로의 피난을 도운 공신임에도 목협만치가 이후 기록에서 사라지는 것은 권력 싸움에서 밀렸다는 웬만한 사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신편 한국사에는 권력 싸움에서 밀린 목협만치가 백제를 떠나 왜로 간 것이 477년의 일로 되어 있고, 일본의 학자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의 견해를 따른 것 같다. 야마오는 목협만치가 해구와의 권력 다툼에 패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보았으며 그 시기를 477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山尾幸久,<日本書紀のなかの朝鮮>,≪日本と朝鮮の古代史≫, 三省堂選書 57, 1979, 136쪽). 이 477년에는 백제에서 문주왕을 지지해 줄 유력한 왕족이었던 내신좌평 부여곤지도 사망한다(학계에서는 이를 해구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보고 있다). 문주왕이 해구에게 시해된 것도 부여곤지가 사망한 이듬해의 일이다. 부여곤지 역시 근개루왕의 왕제이면서도 근개루왕에게 떠밀리다시피 해서 백제를 떠나 왜로 향해야 했었다. 백제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을 잃고 웅진으로 내려오기 14년 전인 461년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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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원래 나무위키에 내가 썼던 것인데 내가 차단당해서 지금 여기로 옮겨와서 쓴다. 위키니트짓을 벗어나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자. 앞으로 거기서 썼던 것들을 여기로 옮겨올 참이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위키니트짓을 관둘 수 있게 되었는지 거기서 본 온갖 머갈 빻은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참이다.